역사와 문화 SAMCHEOK CULTURAL CENTER

역사
삼척지역 문화유산의 생명과 가치를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창조적 지역문화의 산실

1.선사시대(先史時代)와 삼척

삼척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이다.
구석기시대란 일반적으로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나서 돌로 만들어진 도구를 사용하였던 시기를 말하는데 세계적으로는 200만년 전부터, 한반도에서는 50만년 전부터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이 시대의 유적유물은 삼척시 원덕읍 노경리와 동해시 북평동 구호마을, 발한동택지개발지역에서 다량 출토되었다.
다음으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세계적으로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7,000-8,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며,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5,000년경에 시작된다.
이 시대의 특징은 토기(빗살무늬토기)의 사용과 농경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은 아직 삼척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의 양양군 오산리와 강릉 영진리, 금진리 등지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앞으로 삼척지역에서도 신석기유적의 발견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단군왕검 BC2,333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는 신석기의 즐문토기(櫛文土器;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집단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국의 철기문화가 도래하는 기원전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대개 생활유적(주거지, 생활유물)과 무덤유적(고인돌, 석관묘)으로 대별되며, 삼척지역에서는 원덕읍 호산과 근덕면 장호, 오십천유역의 봉황산 일대, 교동과 성북동 일대, 그리고 인근의 송정. 북평. 구미. 구호동 등에서 마제석촉(磨製石촉)과 석부(石斧;돌도끼), 석검, 민무늬토기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 당시 삼척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유적인 지석묘(支石墓, 고인돌)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지만 동해안에는 고성(장평리.죽정리) 양양(범부리) 강릉(안현동.장현동) 동해(부곡동.이로동.송정동) 울진(나곡리) 등지에서 10여 기 정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鐵器)시대에 접어들면서 문화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철기제조기술의 유입과 그 영향에 의한 새로운 토기(경질문토기, 타날문토기)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이 시대의 유적유물은 삼척 오십천 하구의 오분동, 맹방리, 노경리 등과 인근 전천강 하류인 북평항만부지와 강릉의 안인리, 양양군 가평리에서 집자리유적이 발견되었으며, 그 외 금진리유적 등이 발굴되어 철기시대 영동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종래 영동지방의 무문토기 전통이 철기문화와 경질회도(硬質灰陶)가 전래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융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철기와 함께 기존의 석기(石器)를 다량으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기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한반도에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정립 직전의 시기로서, 한군현(漢四郡)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다.
당시 동해안 북부지방은 임둔군(臨屯郡)의 통치를 받다가 기원전82년에 임둔군이 폐지되자 일시 현도군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 뒤 현도군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가 관할하다가 AD(기원후)30년 낙랑군(樂浪郡)의 내분으로 동부도위가 철폐됨에 따라 영동지방은 한(漢)나라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 무렵 동해안 중부지역은 소위 읍락사회(邑落社會)의 독자적인 군장국가(君長國家)가 형성되었는데 강릉지역에서는 예국(濊國)이, 삼척지역에 실직국(悉直國)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잃어버린 왕국 - 실직국(1)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한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腸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기지화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고 한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삼척지역의 실직국시대 유적으로는 원덕읍 노경리 및 근덕면 맹방해수욕장의 초기철기시대유적과 북평항만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 및 돌톱 구슬 토기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관동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 3월 29일 삼척시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 시립박물관 제1전시실(선사·역사실)에 전시되어 있다.

3. 잃어버린 왕국 - 실직국(2)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이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경북 안강)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인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 같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한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박씨),사량(김씨),본피(정씨),모량점량부. 손씨),한지(잠탁부. 배씨),습비(석씨.안강지역)-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漢祗部,또는 한기부漢岐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통치를 받는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덕)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4. 실직주의 군주 - 김이사부

신라에서 주(州) 군(郡) 현(縣)제도를 실시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6년(505년) 2월인데 이 때 동해안에는 유일하게 실직국(삼척)에 실직주를 설치했다. 이 실직주에 첫 군주로 부임한 인물이 이사부(異斯夫)였으며, 신라시대 군주(軍主)라는 이름은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다. 군주는 지방행정의 수장일 뿐 아니라 군사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지위였다.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한 이사부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4대 손(孫)으로 이름은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흔히 이사부로 알려져 있다. 이사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 정립시대로 가던 때,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정치. 군사. 학문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산국과 대가야 정벌을 완수했고, 진흥왕 때에는 병부령으로서 중앙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왕에게 아뢰어 국사(國史)를 편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사부의 많은 활약 가운데서도 우리 삼척과 연관된 것은 우산국(于山國) 정벌이다.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할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부족국가였으며, "우혜" 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우혜왕은 대마도에서 "풍" 이라는 미녀를 데리고 와 왕후로 봉한 다음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풍미녀와 사랑놀음에 빠졌다. 게다가 왕후의 사치를 위해 삼척의 해안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신라의 인근까지 노략질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이에 신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마침내 신라왕은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에게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511년 이사부는 즉시 출병하여 우산국에 접근했지만 천연요새와 같은 지형과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온 이사부는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키고, 이듬 해인 512년 실직주를 그대로 존속시킨 상태에서 영역을 확장하여 강릉의 하슬라주 군주에 오른 후 다시 우산국 토벌길에 오른다. 삼척의 정라항에서 우산국에 다다른 이사부는 우혜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우혜왕은 지난번 싸움에서 후퇴한 신라군인지라 얕보고 그 자리에서 사신의 목을 벤 후 전투를 시작합니다. 이사부는 계획했던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어 간다.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만들어 세운 대형 나무(木)사자로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던 것이다. 이 광경에 우산국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커다란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으니...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이 때 신라의 군사들이 합창하여 큰 소리로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서 섬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 고 위협했다. 이미 이상한 짐승에게 질려버린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데다가 신라군이 쏘아대는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기 바빴으므로 우혜왕은 자신의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軍門)에 던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우산국은 멸망하고 이 때부터 실직주의 관할영지가 된 것이다.
512년. 이렇게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으니 울릉군 서면 남양포구의 사자바위와 투구바위가 그것이다. 신라군이 군선(軍船)에 싣고 왔던 나무사자가 울릉도에 내려져 바위로 변했다는 사자바위, 우혜왕이 항복할 때 벗어던진 투구가 남아 투구봉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직도 울릉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척시에도 우산국 정벌의 기념물이 있다. 사직동과 근덕면의 경계(옛 삼척시.군의 경계)인 한재 길 옆에 세워진 사자상과 동해시와 경계인 등봉리 주유소 길 옆의 사자상(獅子像)으로 1986년 박환주시장 재임시 향토사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산국 정벌 때 활용했던 나무사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삼척시 경계지역에 돌사자상을 설치해 둔 것이다.
우산국 정벌,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시켰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토로 확실하게 자리매김되고 있기 때문이다.

5. 실직국의 부흥운동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동해남부 고속도로를 타고 울진쪽으로 향하다가 보면 죽변 외곽도로인 간이비행장이 나오는데, 그 비행장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봉평신라비와 비각이 있다. 이 봉평신라비에서 "실직국의 부흥운동" 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봉평신라비는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 15일자 대구 매일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졌으며, 문화재관리국(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흥왕순수비보다 훨씬 이른 법흥왕 11년(524년)에 제작 건립된 봉평신라비는 1988년 11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의 재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4각을 이루고 있으나 글씨가 새겨진 1면만 약간의 다듬질을 했고 다른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2미터 높이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총 10행 399자이며,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로서 치졸한 편이고,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문단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신라인 13명이 갑진년 정월 15일에 종묘에서 조상신으로부터 게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둘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13명의 일행이 거벌모라 남미지에 순행하여 벌교령(오늘날의 비상게엄령)을 내린 것으로, 셋째 문단은 신라 6부(部)가 상의하여 정한 바에 따라 집행관인 대인에 의해 지방관 및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이며, 넷째 문단은 총지휘 감독한 실지군주와 석각한 사람 등의 인적사항으로 파악된다.
이 비문에 의하면 50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던 실직국 백성들은 524년 거벌모라성을 불태우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신라측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실직국으로서는 국권회복운동 또는 부흥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만다. 신라의 법흥왕이 친히 출병하여 난을 평정하고 지방관인 실지군주와 그 아래 실지도사와 거벌모라 도사에게 장형의 벌을 내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그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비석을 세워둔다.
비문을 보면 거벌모라의 남미지라는 노인촌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데,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칭하며 이들은 다른 지역주민들보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리라 보며, 거벌모라도사는 실지도사와 함께 삼척의 실지군주의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이것은 곧 신라에 정복당했던 실직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비문을 통해 "실직" 은 법흥왕 대에 "실지" 라는 지명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지방행정제도가 오늘날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군주 아래, 시장 군수급의 도사가 지역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주의 경우 군주 아래 삼척의 실지도사와 울진의 거벌모라도사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실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거벌모라의 호족이었던 진(秦)씨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일본 경도지방의 전역에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계 주민들을 장악하고 그 지방의 가장 힘있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호오류사라는 절을 하타 가와가츠가 세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힘을 짐작하게 한다. 진(秦)은 일본어로 하타, 울진의 옛이름 파단(波但) 또한 일본어로 하타이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 때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나타안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일본의 나라현 교토후 인근의 우즈마사촌(太秦村)에는 진씨(하타)의 종가가 살고 있으며, 진씨의 호수는 7,100여 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1988년 7월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하끼박사가 일본학자로는 최초로 봉평신라비를 연구하기 위해 울진을 방문했고, 1989년에는 하타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일본 나가오카교오市 요오쿠사(寺)의 주지 구사카 다이코씨가 울진을 방문했으며, 1990년 봄에는 일본 영화감독 일행 5명이 봉평신라비와 마을 전경, 봉평해안과 북면 상당리의 진씨가(家)를 찾아 가대(家垈;집터)를 촬영해 갔다. 모두가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이들 모두 울진의 봉평신라비에 새겨진 "파단(波但)" 이라는 글자를 보고 하타(秦)씨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라고 확신했다. 일본의 사료에 진씨와 한씨, 하타우찌와 아야우찌 이 2대 씨족의 시조는 모두 응신왕 대인 4세기 후반에 귀화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실직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추정되는 진씨 일족의 일본망명설은 향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6. 통일신라의 문화유산 - 헌화가와 해가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동해안의 실직주와 하슬라주(강릉)를 합쳐 명주(溟州)라 하고, 실직주는 삼척군(三陟郡)으로 개명함으로써 "삼척" 이라는 지명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척주지에는 경덕왕 18년 759년에 "삼척" 으로 개명되었다고 기록됨). 관할영역은 죽령현竹嶺縣(고구려-죽현현竹峴縣) 만향현 萬鄕縣(또는 滿卿縣,고구려-滿若縣) 우계현羽谿縣(고구려-羽谷縣) 해리현海利縣(고구려-波里縣) 등 4개 현으로 오늘날 옥계에서 원덕까지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유산으로 삼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두 편의 향가인데, 바로 헌화가와 해가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두 편 노래의 작품배경이 되는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모든 상황과 주변환경으로 미루어 볼 때 헌화가는 임원지역, 해가사는 증산 또는 추암지역의 해안 어느 지점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와 그 창작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순정공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는데, 그곳은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바다를 두른 곳으로 높이는 천장이나 되고, 그 위에 탐스런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水路)부인이 누가 저 꽃을 꺾어오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종자들은 사람이 올라가지 못할 가파른 절벽이므로 모두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 때 마침 어떤 노인이 암소를 끌고 그 곁을 지나다가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절벽 위의 꽃을 꺾어주면서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그 노래가 헌화가이다.
"자주빛 바윗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그리고 이틀 후에 임해정(臨海亭)이란 곳에서 또 점심을 먹게 되는데 이 때 해룡(海龍)이 홀연히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서 바다 속으로 끌고 갔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지만 부인을 찾아올 계책이 없었다. 이 때 또 한 노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 하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순정공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해룡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순정공에게 바친다. 순정공이 바다 속 용궁의 일을 물었더니 칠보궁전에 음식이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수로부인의 옷에서는 일찍이 인간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색다른 향기가 풍겨났다. 원래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었으므로 매번 깊은 산과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에게 붙잡혀 갔던 것이다. 여기서 백성들이 수로부인을 구하려고 부른 노래가 해가사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 빼앗아 간 죄 얼마나 큰가 / 네 만일 거역하여 내놓지 않는다면 /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그러면 동해안의 어느 곳에서 헌화가와 해가사가 불리워졌을까. 문헌자료가 없으므로 바다의 용과 수로와 연관된 지명, 그리고 그와 연관되는 민속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강릉까지 올라오는 길에 절벽이 병풍처럼 바닷가에 둘러쳐진 곳은 임원과 용화 사이의 해안이다. 임원항 회센타 남서쪽 산을 "수리봉" "수로봉" 이라 부르는데 그 지역 노인들에 의하면 예전에 철쭉꽃이 많이 피었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의 해안가 벼랑은 헌화가의 작품배경같은 분위기이다.
또한 삼척시내와 인접한 와우산 자락의 해안마을인 증산과 추암지역에는 암소를 끌고 와 철쭉꽃을 꺾어바치던 노인, 해룡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해내는 계책을 일러준 노인을 연상케 하는 "신우(神牛)의 수레바퀴 자국" 이 남아있었다는 척주지의 기록이 보이고, 그 지역 굴암이라는 곳에 용묘(龍墓)가 있으며, 마을사람들이 막대기로 땅을 치던 것과 흡사한 "떼불놀이" 와 거북의 껍질을 문 위에 걸어두고 액을 막는 민속이 전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1991년 이어령박사께서 문화부장관 재직시 죽서루 경내의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 제막식 참석차 삼척을 방문하여 삼척을 "헌화가와 해가사의 고장" 으로 가꾸고 홍보하라는 조언에 힘입어 삼척시에서는 철쭉을 시화(市花)로 삼고,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헌화가를 배경으로 한 "실직국 철쭉놀이" 란 작품을 출품하여 널리 홍보하기도 하였다.

7. 고려시대와 삼척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초기에는 지방행정을 정비하지 못하고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는 한편으로 지방에는 수령을 파견하지 못하고 지역의 힘있는 호족들의 자치에 맡겼다. 삼척지역도 당시의 호족들이 자방자치의 형태를 취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척을 본관으로 하는 성관 즉 삼척 김씨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특히 삼척에서는 진주(眞珠)라는 지방별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삼척에 강력한 호족세력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방별호라는 것은 지명 이외에 그 지역에 대한 별호를 말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걸쳐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지방에 있던 강력한 호족세력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본관이나 봉작명을 사용하게 했던 것이다. 삼척이 진주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신라말과 고려초의 삼척지역에 그만큼 강력한 호족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고려는 성종2년(983)에 이르러 12목과 병마사제도를 마련하여 처음으로 지방장관을 파견하였으며, 성종14년(995)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오늘날 강원도는 함경남도의 일부를 합쳐 삭방도라 하였다. 그리고 도 아래의 주요 고을에는 도단련사 단련사 등을 두어 다스렸으며, 삼척은 삼척군에서 척주로 승격시켜 단련사(전국 11개 주에 둔 지방관. 군사적 감찰기관 성격. 1005년까지 둠)를 두어 다스렸다. 현종9년(1018)에는 지방제도를 5도 양계로 정비하고 그 밑에 4도호부, 8목, 56군현, 28진을 두었는데 영동지방은 함경남도 지역과 합하여 동계가 되며, 이때 삼척은 척주에서 삼척현으로 개명된다.

고려시대의 군제는 중앙에 2군 6위가 있어서 전국을 통괄하였고, 각 도에는 주현군이 있었으며, 영동지방인 동계에는 일반 주현보다 보강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삼척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외적의 침입도 많았다. 삼척지역의 외적의 침입은 북방에서 거란과 몽고의 침입, 동해안에서 왜구의 침입으로 이원화되었다. 북방으로부터 외적의 침입은 먼저 성종과 현종 연간에 거란의 침입이 있었으나 삼척지역에서는 별다른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고종 연간의 몽고침입 때에는 이승휴가 삼척주민들과 함께 요전산성에서 항전하였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안사도 항전했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다. 몽고군이 삼척을 비롯한 영동지역을 침입한 것은 제4-5차 침입인 1247-1253년이었다. 한편 이 무렵 동해안에는 왜구의 침입 또한 많았다. 이처럼 동해안을 통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원인은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굶주린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주 침입경로가 영동지역이었던 까닭은 동해안의 해류가 일본에서 곧바로 영동 해안지역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입은 공민왕 이후 극성을 부리는데, 이들은 동해안 연안으로 들어와 농민들을 약탈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미륵신앙에 몰입하게 되고, 천년 후의 극락세계를 염원하며 갯벌에 향을 묻는 매향(埋香)의식이 확산되었다. 동해안에서도 매향의식이 행해졌는데 척주지에 의하면 1309년 8월 강릉도 존무사 김천호와 강릉부사 박홍수·삼척현위 조신주 등 동해안의 지방관들이 모여 미륵부처님께 서원하며, 평해 해안언덕에 100조·삼척 맹방촌 물가에 250조·강릉 정동촌 물가에 310조·울진 두정에 200조 등 동해안 5개소에 모두 1,500조의 향나무를 묻었다.
한편 고려시대 중·후기가 되면 삼척지역에는 새로운 지방호족이 출현한다. 개성부윤을 지내고 삼척군대광에 책봉되었던 박원경을 시조로 하는 삼척 박씨, 목조(穆祖) 아버지인 이양무장군 부인의 아버지이며 상장군이었던 이강제를 시조로 하는 삼척 이씨, 충렬왕 때 이부시랑을 지내고 삼척군으로 책봉받은 진의귀를 시조로 하는 삼척 진씨 등의 호족들이 새롭게 자리잡으면서 삼척의 지방문화를 한층 다채롭게 꽃피우게 된다.

8. 제왕운기의 저자 - 이승휴

이승휴는 고려 고종11년(1224)에 태어나서 충렬왕 26년(1300)까지 살았던 고려후기의 문인이며 정치가였다. 이승휴의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다. 경산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이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가리현인으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 그곳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그의 일생 대부분은 외가(外家)인 삼척의 두타산 밑 구동(龜洞 :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에서 보냈다. 대현 이율곡이 외가인 강릉의 역사인물인 것처럼 이승휴도 삼척의 역사인물로 숭앙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종39년(1252) 이승휴는 29세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가 계신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1253년 몽고의 제4차 침입으로 강도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삼척의 요전산성에서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두타산 밑의 구동으로 들어가 지금의 천은사 옆 냇가인 용계(龍溪)변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게 된다. 그러다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인 1263년 관동안집사(關東安集使)로 온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들어가, 다음 해 경흥부(강릉) 서기로 발탈됨으로써 관계(官界)에 첫발을 딛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지방관 생활은 오래지 않았고, 곧 중앙의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로 승진되어 중앙정계의 핵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충렬왕6년(1280) 감찰사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 항목으로 간언하다가 파직당하고 만다.

이승휴는 파직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집이름)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 이 때 그는 국사와 세론에 일체 함구하고자 결심하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제왕운기가 탄생한 배경이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규정한 사서(史書)로 유명한 제왕운기가 우리 삼척에서 삼척의 인물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이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상하 2권 1책으로,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신화시대부터 원나라의 흥기까지 7언고시(七言古詩) 264구(句)로 읊어놓았으며,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동국군왕개국연대)와 고려조의 역사(본조군왕세계연대)로 나누어 각각 264구 1460언의 7언고시, 152구 700언의 5언고시로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하였는데 우리나라를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으며, 단군(檀君)을 우리민족의 시조로 내세워 우리민족이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강조했고, 최초로 우리나라 전체를 "조선(朝鮮)" 이라고 지칭했다. 또한 발해사를 현존 사서 가운데 최초로 우리민족사에 포용하였으며, 우리문화를 중국과 구분되는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했다. 사대를 표방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처럼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등한 구조 속에서 읊고 있는 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왕운기를 저술하고 2년 후 1289년 용안당 남쪽에 보광정(?光亭)을 건립하고 그 곁에 표음정(飄飮亭)이란 샘을 만들고, 정자 아래 지락당(知樂塘)이란 연못을 시설하여 살다가 71세 되던 해(1294) 홀연히 용안당의 간판을 간장사(看藏寺)로 바꾸어 놓고 모든 재산을 불가에 희사한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이승휴를 특별히 기용하여 개혁정치의 중심세력으로 활약하게 한다. 그러나 국정이 계속 표류되자 이승휴는 자신의 힘이 미력함을 인식하고 벼슬에서 물러난다. 이승휴가 벼슬자리를 내놓고 정든 구동으로 돌아온지 2년 후인 1300년 10월, 77세의 나이로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치게 된다. 고려사 열전 이승휴조 끝 부분에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 구함이 없었으며, 심히 부서법(불법)을 좋아했다" 라고 평하였다. 현재 그의 묘가 성주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이승휴의 아들은 3형제인데, 첫째아들의 이름은 임종(林宗)으로 등과하여 헌부산랑의 벼슬에 있었으나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셨고, 둘째 아들은 담욱(曇昱)으로 출가하여 불제 자의 길을 갔으며, 셋째 아들은 연종(衍宗)으로 등과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이르렀다 한다.

9. 죽서루의 가객 - 심동로

삼척심씨의 시조이며 죽서루의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심동로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통천군수를 지낸 분이다. 본래 이름은 한(漢), 호는 신재(信齋)이며 검교(檢校)로 있던 심문수의 아들이었다. 심동로는 고려말 충혜왕3년(1342) 생진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그해 가을 직한림원사. 성균관학록이 되었으며, 1351년에는 내직으로 들어가 우정언이 되었다. 그후 공민왕 10년(1361)에는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심동로는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해 지방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했을 정도로 효성스런 분이었다.
강원도 통천군수를 지내면서 고려말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다. 공민왕은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의지가 워낙 굳어서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허락하면서 그 뜻을 높이 사서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 는 뜻으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심한이란 이름 대신 심동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학사승지가 되었을 때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심동로는 신보다 학식이 높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도 먼저 올랐으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주십시오" 공민왕이 이색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당대 유학의 거장인 이색이 그러한 말을 하였을 정도이면 심동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에 김구용이 안사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를 찾아와서 그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여 심동로의 호인 "신재" 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그의 집에 걸어주었다. 이처럼 삼척으로 오는 많은 관원들은 반드시 심동로를 찾아와서 나라 일을 함께 논하고 시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8년(1282) 원나라에서 진사 급제 후 돌아와 예빈시승의 벼슬에 있던 이구(李球)는 "관동의 군자는 두 사람으로 심동로와 최복하다" 라고 평했는데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이고 / 누중의 가객은 심중서로다 /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 시와 술에 의탁하여 / 한가한 나를 위해 자리를 베풀었네" 심동로는 삼척에 살면서 날마다 죽서루와 해암정을 오가며 시를 썼다. 추암 능파대 서쪽에 지은 해암정은 삼척의 해금강이라 할 만큼 경치가 좋으며, 해암정 서쪽 신재공이 은거했던 터를 "신대감터" 라고 부른다. 세조7년(1461) 체찰사 한명회는 이곳에 들러 능파대(凌波臺)라 이름을 지었고 1530년 안찰사 심언광이 중건했으며, 1675년 송시열이 해암정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심동로가 은거하던 곳은 지금의 동해시 추암동 산기슭인데 이곳을 휴산(休山) 또는 퇴평(退坪)이라 하며 1931년 후손들이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심동로는 삼척에서 후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남은 인생을 다 바쳤다. 그러므로 삼척지방의 학풍을 진흥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년에는 나라에서 예의판서와 집현전제학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임금은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산수와 시를 벗하였다. 심씨가 삼척을 본관으로 한 것은 심동로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의 덕행과 문장은 [해동명신록]에 수록될 정도이다. 삼척의 자랑인 관동팔경 제1루 "죽서루" 와 심동로는 이러한 인연이 있다.

10. 용비어천가의 첫째 용 - 목조 이안사

조선왕조의 건국은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실현되었지만 그 터전은 목조 이안사에 의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실제로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렇게 설명되었다. 세종27년(1445) 4월에 권제, 안지, 정인지 등이 편찬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목조 이안사로부터 왕조의 터전이 잡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육룡이 나리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 라고 읊었는데 이 육룡의 첫 인물이 바로 목조 이안사이다. 육룡은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다음에 익조 이행리(翼祖 李行里), 도조 이춘(度祖 李椿),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으로 이어진다.
목조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지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려 고종18년(1231)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이성계가 조성왕조를 개국하기 162년 전후이다. 목조는 전주에서 출생했고 삼척에 옮겨 살다가 다시 함경도 덕원부(德源府) 용주리(龍珠里)로 옮겼고, 다시 와뚱(幹東)으로 옮겨살았다.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목조가 전주에 살 때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와서 목조가 사랑하는 기생과 관계하자 둘은 싸움이 벌어졌고, 전주의 지주(知州;주의 장관)가 산성별감과 한편이 되어 싸우게 되었다. 지주가 조정에 보고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목조를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목조는 미리 알고 삼척의 활기리로 이주하게 된다. 이 때 목조를 따르던 170여 호가 함께 이주했다. 무슨 연유로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하였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삼척은 목조 이안사의 외가(外家) 지역이기 때문이다. 목조가 처음 터를 잡은 삼척의 미로면 활기리는 원래 활터라 불렀는데 후에 목조가 살던 터라고 해서 임금황자를 써서 황기(皇基)로 바뀌었다. 활터는 궁기(弓基)를 뜻하는 곳이었는데 활터-황기-활기로 그 지명이 변했다. 그 터는 현재 미로면 활기리의 두메관광농원에서 조금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목조가 살았던 곳임을 알려주는 구거지비각(舊居地碑閣)이 세워져 있다. 활기리는 삼척군 미로(未老)면에 속했고, 미로면은 현종3년(1662) 당시 삼척부사 허목이 미로리(眉老里)라고 부른 데서 오늘과 같은 지명으로 정착했다. 이곳에 살 때 목조의 부친이 사망했다. 그 유명한 "백우금관(白牛金冠)의 전설" 과 같이 도승이 일러준 대로 백우(白牛)와 귀리금관(金冠)을 준비하여 묘를 쓰게 됨으로써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목조의 삼척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사망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삼척시에서 오십천을 따라 서쪽으로 60리, 상정리에서 15리 노동산에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준경묘)가 자리잡았고,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무덤(영경묘)은 동산리에 있다.
활기리 목조의 옛 집터에는 지금도 섬돌과 주춧돌이 남아있다. 목조가 삼척군 활기리에 부모를 묻고 다시 함경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앞서 전주에서 싸웠던 산성별감이 안렴사 벼슬에 올라 삼척고을로 순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앉아서 당하기 보다 먼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함경도로 들어갔다. 이 때에도 전주에서 따라왔던 170여 호가 함께 이주했다. 목조의 삼척 미로면 활기리 생활은 잠깐이었지만 부모를 묻었고 자기의 집터까지 남겼으므로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삼척의 활기리가 조선왕조 건국의 터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11. 조선시대 삼척지방 행정조직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조직은 전국을 8개 도(道)로 나누고, 각 도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배치하는 동시에 도의 하부조직으로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군(郡), 현(縣)을 두었다. 지방행정의 책임자로는 부에 종2품의 부윤(府尹), 대도호부에 정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목에는 정3품의 목사(牧使), 도호부에는 종3품의 부사(府使), 군에는 종4품의 군수(郡守), 현에는 종5품의 현감(縣監)을 수령으로 배치하였는데, 삼척은 태조2년(1393) 목조의 외향이며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현에서 부로 승격시켰다가(기념으로 홍서대 하사) 태종13년(1413) 삼척부를 도호부로 바꾸어 종3품의 부사를 배치하였다.

군사제도는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육군의 경우 태조6년(1397) 삼척진이라는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인 첨절제사를 부사가 겸직하였는데, 세조1년(1455) 군익도 체제로 인해 삼척진은 강릉도의 우익으로 편성되고 그 수장을 병마단련부사로 칭했으며, 세조3년(1457) 군익도체제가 진관체제로 바뀌면서 삼척진은 거진(巨鎭)이 되어 울진과 평해지역까지 관장하였다. 수군의 경우 태조 때부터 부사가 삼척의 수군본부인 삼척포의 만호를 겸직하였는데 세종1년(1419) 부사가 삼척만호를 겸직하던 것을 페지하고 별도의 수군첨절제사를 파견했으며, 세조3년(1457) 진관체제로 바뀔 때 삼척진관을 설치하고 삼척포 첨사가 첨절제사로 되는데 그 아래 안인포ㆍ고성포ㆍ울진포ㆍ월성포를 두었다. 그후 인조5년(1627)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한 진영의 수장인 영장이 파견되면서 삼척포진은 영장이 영동지역의 속오군을 다스리고 울릉도의 치안을 담당해 오다가 고종35년(1898) 삼척포진이 폐지될 때 함께 없어졌다.
조선시대 각 급 수령 간의 위계는 부임하는 수령의 품계 차이는 있었지만 부에서 현에 이르기까지 횡적으로는 대등하게 도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각 급 수령에게는 지방의 행정권과 함께 군사직과 사법권까지 부여되어 있어 모든 재판을 자신의 명의로 할 수 있었다. 다만 곤장 50대 이상 사형까지는 관찰사의 허가를 받아서 형을 집행하였다. 도호부의 사무는 부사의 보조기관인 호장 이하 6방의 이속들에 의하여 분담되었고, 이러한 이속(吏屬)들을 아전(衙前)이라 하였으며 주로 그 지역의 토착인들을 기용했는데 6방의 분장사무는 다음과 같다. 이방(吏房) - 인사, 비서, 기타 사무에 관한 사항 / 호방(戶房) -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세(田稅), 기타 재정사무 / 예방(禮房) - 의례(儀禮), 제사, 학교 등에 관한 사무 / 병방(兵房) - 군정(軍政)에 관한 사무 / 형방(刑房) - 법률, 소송 등에 관한 사무 / 공방(工房) - 공장(工匠), 영선(營繕) 등에 관한 사무 부사의 군사.경찰권의 보좌역으로는 군교(군관,포교)가 있었는데 이들의 신분은 아전보다 아래직이었고, 이들 군교 밑에 흡예, 문졸, 심부름하는 일수, 죄인을 문초하는 나장, 군인들의 노비인 사령이 있었다. 또 통인이라 일컫는 급사직(집사ㆍ사환)이 있었는데 이는 서리(아전)의 아들로서 부사의 신변을 보살폈고, 이외에도 수령의 일상생활에 사역되는 급창(及唱) 고직(庫直) 방자(房子) 등의 관노와 기생, 수급(물심부름꾼) 등의 관노비가 있었다. 한편 부사의 자문기관으로 군아(軍衙, 군청)에 향소(鄕所 : 후기에는 향청)를 설치하여 덕망있는 지역의 유력인사를 향임(鄕任)으로 임명하여(부에는 4-5명, 군에는 3명) 향리의 악폐를 방지하고 풍속교정과 군.현의 하부조직인 면(面)의 도윤 즉 면장 추천권까지 부여하였다. 향소의 장은 좌수(座首;임기2년)라 하고(차석은 별감別監) 연장자 중에서 수령이 임명하였다. 도호부의 하부조직으로 면(面) 또는 사(社) 방(坊)이 있고, 그 아래 동(洞) 리(里) 촌(村)이 있었고, 면 사 방의 장(長)은 존위(尊位) 도윤(都尹) 면임(面任) 방장(坊長) 사장(社長), 그리고 동과 리의 장(長)은 동수(洞首) 리정(里正) 좌상(座上) 두민(頭民)으로 불리워졌다.
동. 리 밑에는 최말단조직인 매5호(戶)를 한 개의 통(統)으로 하는 5가통(家統)제도가 있었고, 5개 통을 1개 리로 하고, 약간의 리를 합하여 면(面)으로 하여 농업을 지도하는 권농관을 배치하였다. 한편 지방의 교통 통신행정을 관장하는 특수지방관직으로 찰방(察訪 : 종 6품)이 있었고(1508년 역승驛丞 ⇒ 찰방), 삼척은 동해안의 강릉 삼척 울진 평해의 16개 역참을 관할하는 역도 소재지가 있었다.

12. 조선시대 삼척지방 행정관청

조선시대의 삼척지방 행정관청은 동헌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었으므로 동헌터가 있는 지금의 죽서루 부근이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다.
#칠분당(七分堂) - 부사가 공무를 보는 동헌(東軒)을 말하는데 옛이름은 매죽각(梅竹閣) 또는 역근당(易近堂)이라 하였다. 1908년 진주관으로 이전한 후 군수의 관사로 사용해 오다가 건물이 노후되어 1979년 헐어 없앴다. 위치는 죽서루 진입로와 38번 국도와의 분기점이며, 38국도 개설시 도로부지에 일부 편입되고 남은 부지에 주춧돌을 모아 동헌터 소공원으로 조성했습니다. 아사(衙舍) 군아(郡衙) 현아(縣衙)이라고도 한다.
#내아(內衙) - 지방관청의 안채인 내동헌을 말하는데, 동헌의 동편 즉 38국도 부지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향서당(鄕序堂) - 일명 향청(鄕廳)이라 하여 풍속교정과 향리규찰 등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이 있던 곳으로 영조45년(1769) 부사 서노수가 중건하여 좌수1명과 별감3명을 두었는데, 위치는 죽서루 경내 동남쪽에 있었다.
#장관청(將官廳) - 군교와 사령(심부름꾼)의 집회소로 일명 장청(將廳)이라 하였는데 영조 7년(1731) 부사 조익명이 지었다. 위치는 38국도에서 죽서루로 진입하는 남쪽 인접지의 옛 경찰서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다.
#좌기청(坐起廳) - 일명 정청(政廳)이라고도 하며 이방(吏房)이 공무를 보던 곳인데 선조36년(1603) 부사 안종록이 중수한 것을 영조21년(1745) 부사 서노수가 이를 다시 중수했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작청(作廳) - 인리청(人吏廳)으로 일명 질청(迭請)이라고도 했는데 아전들의 집회소였습니다. 죽서루 동쪽 현 죽서루 주차장 부지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낭청방(郎廳房) - 관아의 당하관이 거처하던 곳으로 38국도에서 죽서루로 진입하는 옛 경찰서 터에 있었다.
#군기청(軍器廳) - 무기를 취급하던 곳으로 삼장사 터에 있었다.
#뇌옥(牢獄) - 죄인을 가두는 감방으로 죽서루 동남쪽 구 농협관사 즉 현재의 죽서루 제2주차장 터에 있었다.
#보민청(補民廳) - 세조1년(1455) 8월 수해로 인한 수재민을 구호하던 관청으로 죽서루 동쪽 현재의 죽서루 주차장 입구 터에 있었다.
#경사재(敬思齋) - 현종2년 부사 허목이 건립하여 퇴청 후 독서하던 곳으로 위치는 관아의 북쪽에 있었다 한다.
#진주관(眞珠館) - 왕명을 받고 오는 벼슬아치들을 대접하고 묵게 하는 객사로 원래는 죽서루 밑에 있었으나 중종12년 죽서루 북쪽으로 옮겼다. 그 후 군청사로 사용하다가 1934년 진주관을 헐고 그 자리에 군청의 새청사를 지어 사용하던 중 6.25사변에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1981년 군청사를 교동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현재 삼척문화원이 사용하고 있다.
#칠장방(漆匠房) - 칠장들의 근무처로 광해군7년(1615) 부사 김존경이 진주관 인근에 세웠는데 지금은 죽서루 경내 광장이 되었다.
#기소(妓所) - 관아 기생들의 처소로 연산군 10년(1504) 왕명에 의거 부사 정담이 설치했다 하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읍향당(泣鄕堂) - 삼척포진의 우두머리인 영장의 청정소(聽政所)로서 일명 세검당(洗劍堂)이라고도 했는데 육향산 북쪽에 있었으나 1898년 화재로 없어졌다.
#저양장(猪洋場) - 관아에서 제사 때 쓰기 위한 흑양을 방목하던 곳으로 죽서루 건너편 지금의 무예회관이나 박물관 부지에 있었다.
#산호관(珊瑚館) - 강릉 삼척 울진 평해 관내의 15개 역참(驛站)을 관할하던 곳으로 원래 평릉역(동해시 천곡동)에 있던 것을 영조36년(1760) 교가역(근덕면 교가리)으로 이전하고, 건물은 1899년 헐어서 그 목재와 기와 등은 준경묘와 영경묘의 두 재사(齋舍) 건축에 사용하였다.

13. 삼척포진성

삼척포진은 수군의 기지인데, 현재 오분리 고산성과 정상리 육향산 주위가 그 위치이다. 이 곳은 오십천 하구에 위치하여 수백 척의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자연항구이다. 이 지역은 동해안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함흥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되고 또한 오십천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과 교차하는 동서남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와 고구려는 삼척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마침내 신라가 실직국을 복속시키고 울릉도를 정벌할 때에도 그 출항지가 바로 삼척포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우산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삼척포진이 있는데다가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항구였기 때문이다.
그후 신라는 이곳에 실직정(悉直停)이라는 군단을 두고 국방에 임했고, 고려시대 우왕10년(1384)에는 요전산성을 토성으로 축조(주위 1,870척. 약566.6m)한 후 삼척포진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라는 수령을 두어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삼척포진의 만호는 수령이 겸하였으나 조선 태조 6년(1397) 만호를 첨절제사(僉節製使)로 승격시켜 단독 진장을 두었고, 태종9년(1409)에 다시 부사가 겸직하게 되었다가 세조12년(1466)에 다시 분리되어 진장(鎭將)을 두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병제(兵制)의 많은 변혁을 겪으면서 인조5년(1627) "영장" 이라는 직을 만들어 전문적인 무장이 삼척포진의 책임자가 되게 했으며, 현종13년(1672)에는 삼척포진의 영장으로 하여금 영동 9개 읍의 군사권을 관장하게 했으며 다음 해인 1673년에는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토포사를 겸하게 하여 철원지역까지 수사권이 확대되었다. 숙종20년(1694)에는 울릉도를 수토하기 위해 삼척영장과 울진 만호(萬戶)가 매년 교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동해안의 해상방위와 치안의 본산이었던 삼척포진영은 고종35년(1898) 영장 김범구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지금은 진영의 성곽 남단에 자리잡고 있던 육향산 정상에 1662년 부사 허목이 남긴 척주동해비와 대한평수토찬비만 남아있다.
삼척포진영의 위치는 신라, 고려, 조선 초 세조 때까지 오분리의 요전산성이었으며 육향산 아래로 옮긴 것은 중종 초기인 1510년 전후였다. 1898년까지만 해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밑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남아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동해를 지키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시대의 삼척포진성 자리이다. 이 진영의 성 동쪽 문루를 진동루, 혹은 안해루 또는 세병루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중종 6년인 1511년 삼척부사 이함(李函)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척포진의 아사(衙舍)는 고종35년(1898) 화재로 소실했습니다. 그후 1916년 삼척항을 축조할 때 삼척포진성을 허물었다. 선조 때의 대학자였던 성암 김효원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진동루라는 현판을 썼고, 임진왜란 중에는 부사 안종록이 근덕면 영은사에 있던 8백근짜리 불종을 이 누각에 매달아 위급할 때 종을 쳐 주민을 모아 적을 막아냈으며 후에 불종은 영은사로 돌려 보냈다 한다. 그리고 숙종 37년(1711) 삼척부사로 온 이성조는 글씨 잘 쓰는 선비로서 안해루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고, 죽서루에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써 남겼다. 이 진동루는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왔으며 고종 24년(1887)에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소남 이희수가 다시 [진동루] [토포아문]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고 한다. 이처럼 명사들의 현판글이 많았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으며, 소남 이희수의 [토포아문]이란 현판글은 십 년 전까지 삼척지방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했던 김영경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3년 전에 삼척시에서 구입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14. 진영장

진영장은 1627년(인조 5)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진영의 장관을 가리키는데 일명 영장 또는 진장(鎭將)이라고도 한다. 진영장은 정3품 당상직으로 팔도에 46인과 강화부의 진무영에 5인이 있었다. 강원도에는 3인으로 춘천, 강릉, 삼척에 각각 1인씩 있었다. 이들은 중앙의 총융청, 수어청, 진무영 등과 각 도의 감영 병영에 소속되어 지방군대를 통솔하였다. 영장절목에 따르면 진영장은 반드시 당상관 이상으로 차출하도록 하였지만, 때로는 문관이나 음관이 선발되는 경우도 있어서 군병을 통솔하는데 능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지극히 엄선하도록 하였다. 진영장의 임기는 2년이었다. 아울러 진영장은 절대로 임기 전에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영장의 직책이 고역인 것을 감안하여 후에 영장의 임기가 열 다섯 달로 축소되는 조치가 취해진다. 진영장은 임무가 막중한 만큼 권한도 강했다. 진영장은 10월 보름 이후부터 1월 그믐 이전까지 각 고을을 순력하면서 세 차례 군사를 조련시키고, 연말에는 감사와 병사가 함께 모인 가운데 다섯 진영이 공동으로 한 차례 진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진영장은 평소에는 영이 설치된 진관에 머물러 있다가 농한기에 소속 각 읍을 순력하면서 군병에 대한 조련이나 무기 또는 복장을 점검하였다.

한편 진영장이 순력할 때 군사훈련이나 군무와 관련한 장관 및 수령의 잘못을 진영장이 처벌하고 상부에 보고할 권한이 있었다. 즉 부하인 장관이 잘못을 범하면 영장이 처벌하고, 수령 즉 삼척의 경우 삼척부사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강원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효종대 이후에는 진영장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진다. 즉 수령이 진영장과 높고 낮음을 비교하거나 또는 영장의 명령을 어기거나 접대 등을 소홀히 하면 진영장은 감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중앙의 비변사와 병조에 보고하도록 하였고, 군무에 관한 중대한 잘못을 수령이 저질렀을 경우 계문하도록 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지방수령과 진영장의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대체로 진영장이 인조 때 설치되고 폐지되었다가 1657년 (효종8)에 복구된 이후 이에 대한 혁파논의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일어났는데, 재정문제와 민폐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영동지역 같은 곳은 영장이 없어서 군정이 허술하지만 그만한 물력이 없어서 설치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영장을 비롯한 소속 군인들의 급여와 식량 경상경비를 각 지방도호부에서 부담하도록 되어있지만 삼척부의 경우 그 재정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영장 신설에 따른 가장 큰 문제는 재정궁핍이었다. 다음으로 진영장의 민간에 대한 폐해가 극심하기 때문에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개 이들 영장이 부임할 때에는 진관의 빚이 태산 같아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결국 주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내야 하는 폐단이 연속되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 가둔 다음 돈을 받고 풀어주는 등 이들의 위세가 높아지고 지방수령들이 오히려 위축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나이 어린 무관이 재주 하나만으로 직임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등 위계질서가 극히 혼잡했다. 아무튼 진영장은 그 임기를 채우고 나면 수령 또는 곤수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임기 동안은 군사조련 및 군비확충에 충실해야 했다. 대개 각 도의 감사 병사가 병정을 전담한 데 비하여 진영장은 조련 군기 습진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밖에 각 진에 산재되어 있는 사복시 관할의 목장에 대한 감독업무를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영장제도는 1894년 고종31년까지 존속하였는데, 삼척포진도 이때까지 동해안 해상방위사령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5. 삼척부사 허목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했던 허목선생은 자는 문부 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태령노인이라 했는데 선조 28년인 1595년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전념하여 일찍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의 복상문제와 관련하여 과거를 볼 수 없는 정거의 벌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학문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재야의 지도자로 있던 허목선생이 중앙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시작한 것은 효종임금이 돌아가시고 현종임금이 즉위한 1660년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등용되면서부터이다. 이 때 효종임금의 계모인 조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복상문제로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는데, 허목을 비롯한 남인들은 3년설을 주장하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만 1년설을 주장했다. 이것은 단순한 복상문제가 아니라 현종임금의 왕통의 정당성과 연관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둘째아들인데 형인 소현세자가 죽어 맏이 대신 왕위를 계승했기에 효종을 맏아들로 인정하면 조대비의 복상은 3년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만 1년이었다. 그런데 결론은 당시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라 맏아들이든 둘째 이하이든 그 어머니는 모두 만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주장과 같은 결정이 내려지고, 이러한 복제논쟁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현종임금은 허목을 삼척부사로 임명(좌천)했던 것이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는 한편 척주지 편찬, 척주동해비 건립 등 많은 치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다 1674년 효종왕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는데, 경국대전에는 맏며느리의 상일 경우 시어머니는 만1년 ,둘째며느리 이하는 9개월로 규정되었다. 이 때 조정의 중심을 이루던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왕비를 맏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9개월복을 주장했으나 현종임금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만1년복으로 고친다. 이로써 송시열과 서인들은 실각하고 남인들의 집권과 더불어 허목은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정승에 올랐다. 우의정으로 재임시 유배 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과 대립하고,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허적은 송시열의 처벌을 가볍게 하자는 탁남, 허목은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는 청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78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682년 세상을 하직했다.
허목선생은 그림과 글씨, 문장에 모두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는 척주동해비와 영상이원익비문. 이성중표문이 있고, 그림으로는 묵죽도가 전하며. 저서로는 [동사] [미수기언] 등이 있다.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이 마전군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16. 삼척의병의 항일투쟁

구한말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제도의 변혁과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척사위정의 민족적 사상과 국권수호의 구국적 행동강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항쟁하였는데 삼척에서도 창의장 김헌경(倡義將 金憲卿)과 서기 김달호(書記 金達鎬) 등 유림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항일전을 전개했다.
삼척의 의병은 관동의병과 더불어 원산지역까지 올라가 일본군을 공격했고, 영동의병의 마지막 전투였던 삼척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는 1895년 12월 3일 원주 신림에서 궐기하여 영월 평창 정선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12월 16일 강릉에 들어와 경무관 고준석(高俊錫)을 처형하니 관찰사 이위(李暐) 등이 인제의 산중으로 도망쳐 버렸고, 민용호는 강릉에다 관동창의도병소(都兵所)를 설치하여 관동지방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때 민용호와 강릉 창의장 심홍택(沈鴻澤)은 소모사(召募使) 3명, 전후영(前後營) 2명, 무사. 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삼척에 와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삼척 창의장 김헌경, 서기 김달호, 선봉장 주명승(朱明昇)과 합세하였다. 이리하여 우선 원산에 있는 일본의 세력을 공격하기로 하고 1896년 정월에 강릉을 출발하여 2월 6일 안변의 신평에 도착한다.
그런데 전투준비를 하며 진격하던 중 천지를 분별할 수 없게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 일본군의 습격을 받게 되어 2월 21일 의병들은 할 수 없이 강릉으로 후퇴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원산공격에 실패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무렵 관찰사 서정규(徐廷圭)가 4월 12일 서울에서 내려온 김홍권(金鴻權) 중대장의 관군을 앞세워 반격해 왔다.
처음에는 대관령 밑 대공산성에서 싸워 19명을 사로잡았으나 많은 관군이 계속 반격해 오므로 임계 백복령, 북평을 거쳐 삼척으로 후퇴하였다.
의병들은 삼척에서 변덕스러운 울릉도 시찰사 염석하(廉錫夏)를 먼저 처단하고 앞으로 닥쳐올 대전을 위해 삼척읍성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경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삼척의병을 비롯한 관동창의군은 마지막 보루인 삼척성에 총집결하여 일제의 앞잡이 경군(京軍)과의 대혈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용호대장은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어 몇 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애원했으나 끝내 듣지 않아 결국 일대 혈전을 치루게 되었다.
삼척에 집결한 관동의병은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읍 뒤의 갈야산 쪽으로는 민대장을 위시하여 최중봉(崔中峰), 강우서(姜禹瑞), 이영찬(李永燦), 전치운(全致雲), 신무섭 등이 호를 파고 매복해 있었고, 읍성에는 선봉장 김도현(金道鉉)과 민동식(閔東植)의 부대가 잠복했으며, 죽서루 동쪽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 등 삼척의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때에 경군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내로 들어왔고, 매복해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불을 당기니 이로써 삼척대전 일명 갈야산성의 일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96년 4월 19일 오전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온종일의 혈전이었다.
갈야산과 그 북쪽 산봉 사이인 알개방재는 피차간의 사상자가 많아 피바다가 되었고, 읍성 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의병들은 탄환이 떨어져 오십천으로 후퇴하였고 경군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성 안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는데, 불꽃은 하늘을 찌를 듯 타올랐다.
민대장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오십천을 따라 통리재를 넘어 정선으로 가고, 김도현은 그의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갔다.
삼척 창의장과 서기는 붙잡혀 관군에게 문초를 받은 후 왕의 조칙에 의해 풀려나왔으나 관군은 북평으로 가서 창의장 김헌경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삼척의 대전은 결국 의병군이 대파되었지만 200명의 관군도 50명만 살아 강릉으로 돌아갔으니 모두의 패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삼척혈전은 막을 내렸지만 외세를 몰아내고자 피 흘린 의병들의 의로운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17. 임원리 측량사건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악랄한 수탈과 농민착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지방 등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는데 강원도의 경우 삼척 임원리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삼척의 향토지와 나이 드신 분들의 고증에 근거하여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에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유지는 결국 일본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개인 소유의 임야를 국유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 주민 5백여 명이 운집하였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하며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본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해 임원리에 왔는데, 이 때 뒷산에서 몰래 사진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들은 격분하여 측량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고 불에 태웠다. 그러자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였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덕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8년 4.18 산양서원 묘정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8. 독립운동가 - 김동호

김동호 독립의사는 김시영의 아들로 노곡면 하군천리 98번지에서 태어났다. 삼척이 본관인 선생은 구한말 원덕면장과 노곡면장, 도평의원을 역임하던 중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자 조국독립과 항일운동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1917년 결성된 대한광복회 재무부장 겸 관동지부장으로 임명되자 그 해 10월 경주에서 일제가 당시 우리 백성들을 수탈하여 거두어들인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독립군 자금에 보탰다. 또한 일제가 강제로 빼앗아 운영하던 금광을 습격하고 금괴를 탈취하는 등 독립군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데 주력하였다. 선생은 군자금 모금을 거부한 장승원의 집을 습격하여 처단하고 악랄한 일본헌병들의 분소를 폭파했다. 그 후 만주로 가서 의병학교를 설립하여 독립투사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던 동지의 밀고로 붙잡혀 1918년 경성법원에서 3년 선고를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공주형무소에서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관동지역의 3·1 독립운동을 암암리에 지휘하여 20여 개군 34회 2,500명의 민족 도립운동을 이끌었다. 1922년 공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소를 하고 활동 중 1924년 경성부에 있는 황금정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일본 경찰의 첩자가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그 해 세상을 떠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는 한을 남겼다. 김동호 의사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1985년 9월23일 공훈비를 세웠으며, 부인의 유해와 합장하고, 묘역을 국가유공자 묘역단장사업으로 비각과 상석을 세웠다. 삼척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한 항일독립운동의 인물로 김동호 의사를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 독립운동가 - 심재구

심재구선생은 일본군과 맞서서 독립운동을 한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출신이다. 본관은 삼척으로, 자는 계명(啓明)·아명은 명길(命吉) 또는 재규(在圭)라 불렀다 하며, 부친은 심찬조라는 분이었다. 어버지의 엄한 교육을 받은 심재구 선생은 1905년 7월에 의병장인 신돌석 장군의 부하가 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당시 북삼면 삼화리 홍월평에 있던 논과 소를 판 돈을 군자금으로 하여 의병활동을 하는 등 나라를 구하는 일로 인해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1908년 11월 신돌석 장군이 전사하자 중부지방으로 출동하여 주명식의 부하로 들어가서 계속적인 의병활동을 하게 된다. 심재구 선생은 도총장(都總將)의 직함으로 영주 안동지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수십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올렸다. 1909년 11월 무장한 부하 20여 명을 인솔하고 울진의 각 마을을 돌아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1910년 6월에는 5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봉화에 거주하는 홍재명으로부터 3백냥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7월 봉화 오산리에서 박찬호로부터 금 14원을 모금하고, 선천리에서 모금활동을 하던 중 1910년 10월 14일 홍재명 등이 일본군에 밀고하여 체포되었다. 대구법정에서 소위 강도죄로 10년 징역의 구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13년 3월 일본군의 심한 고문으로 병환이 생겨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심재구 도총장은 1977년 12월 13일 국가로부터 건국포장 제 730호를 받았으며, 1984년 12얼 26일 묘비를 건립하였다.

20. 근현대와 삼척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대원군 집정기(1864-1873)가 끝나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의 도입으로 흔들리다가, 갑오경장 다음 해인 고종32년(1895) 소위 을미개혁으로 일컬어지는 국가제도 전반에 대한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종래의 8도제를 폐지하여 13도제를 채택하고, 구 제도 하의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폐지하고 전국을 336개의 군(郡)으로 개편하였다. 이 때 삼척도호부도 삼척군(三陟郡)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방행정의 수장인 도(道)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령, 현감을 페지하고,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배치하는 동시에 종래 각 지방의 수령이 통괄하던 사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겼습니다. 이 때 삼척포진과 평릉찰방제도가 없어졌다. 군(郡)에는 대신의 추천에 의거 내각에서 발령하는 주임관(奏任官)이 배치되어 도(道)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령에 의하여 관내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향회(鄕會)제도를 채택하여 군회(郡會)는 대회(大會), 면회(面會)는 중회(中會), 리회(里會)는 소회(小會)로 하고, 군회의 경우 군수와 각 면의 집강(執綱 ; 면장)과 각 면에서 선출된 2명의 위원으로 구성하였다. 각급 향회의 부의사항은 교육, 호적, 도로, 납세, 흉년 때의 환난상휼 등 18개 항목에 달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맞아 행정의 주도권이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제(朝鮮總督府制)가 공포되면서 지방제도의 개편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지방행정구역을 13도(道), 317군(郡), 4,322면(面)으로 개편하고 종래의 한성부(漢城府)를 경기도의 관할하에 두는 한편 "면(面)에 관한 규정" 을 공포하여 면(面) 방(坊) 사(社) 등 다양하게 불리우던 명칭을 모두 면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정령(政令)으로 도와 부 군 면 동 리의 관할구역을 대폭 조정하였는데 이 당시 조정된 지방행정구역과 명칭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4년 삼척 관내 12개 면 중 부내(府內) 말곡(末谷)을 합하여 부내면이라 하였고, 도상(道上) 도하(道下) 견박면(見朴面)을 합하여 북삼면(北三面)이라 하였습니다. 부내면은 1917년 삼척면으로 고쳤다가 1938년 삼척읍으로, 북삼면은 1945년 북평읍으로 승격되었다. 1960년 상장면(上長面)이 장성읍(長省邑)으로, 1963년 소달면(所達面)이 도게읍(道溪邑)으로 승격되고, 1973년 장성읍 황지리가 황지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 북평읍과 북호읍을 합하여 동해시로 승격 분리되고, 1980년 12월 1일 원덕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1년 7월 1일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하여 태백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1986년 1월 1일 삼척읍은 삼척군에서 분리되어 시(市)로 승격되었으며, 1986년 4월 1일 원덕읍에서 가곡면(柯谷面)이, 1989년 4월 1일 도계읍에서 신기면(新基面)이 각각 분리 탄생되었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 삼척군과 삼척시를 합하여 삼척시로 개편하였다. 현재 삼척시는 2읍(도계·원덕), 6면(근덕·하장·노곡·미로·가곡·신기), 4동(행정동 : 남양·성내·교·정라)을 관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