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SAMCHEOK CULTURAL CENTER

지명
삼척지역 문화유산의 생명과 가치를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창조적 지역문화의 산실

삼척의 역사와 지명

삼척 지명의 변천사
삼척은 부족국가 시대에는 실직국(悉直國) 혹은 실직곡국(悉直谷國)이라 불렀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파사왕 23년(102)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56년(468)에는 잠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후 신라 지증왕 6년(5050)에는 김이사부가 이곳을 되찾아 실직주(悉直州)가 되어 군주로 봉해졌다.
선덕왕 8년(639)에는 이곳이 진주도독부(眞州都督府)가 되었고 무열왕 5년(658)에는 북진(北鎭)으로 개명하였다.

통일신라때인 경덕왕 16년(757)년에 삼척군(三陟郡)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으며 삼척군에는 죽령현, 만향현, 우계현, 해리현 등 4개현을 태수가 다스렸다. 이후 고려조에 들어와 성종 14년(995) 척주(陟州)라고 다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단련사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다시 경덕왕때 이름인 삼척을 다시 사용하여 삼척현(三陟縣)으로 만들고 이곳에 현령을 두었으며 우계현은 강릉부로 이속하였다. 공민왕 22년(1373)에 현령을 폐하고 안집중랑장을 두었으며 우왕 4년(1379)에는 다시 지군사를 두어 통치하였고 우왕 10년(1384)에 삼척포구에 군사기지를 설치함에 따라 지군사가 만호를 겸직하여 다스렸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삼척군은 태조 2년(1393) 목조의 외향이라는 혜택으로 삼척부(三陟府)로 승격되었고 태조 6년(1397)에 삼척진(三陟鎭)이라는 이름으로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부사가 겸직하였다. 이후 태종 13년(1413)에 삼척부를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로 개명하고 세종 3년(1421) 삼척진의 첨절제사를 병마사로 개명하여 도호부사가 겸직하였다. 세종 4년(1422) 삼척진 병마사를 병마수군첨절제사로 개명하고 도호부사가 겸직하였으며 세조 12년(1466)에는 병마수군첨절제사를 분리하여 진장(鎭將)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성종 6년(1475)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15개 역을 관장하던 교통행정구역인 평릉도(平陵道) 소재지를 평릉역에서 교가역으로 옮겼으며, 인조 9년(1631)에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매곡(邁谷), 부내(府內), 노곡(蘆谷), 덕번(德蕃), 북평(北坪), 박곡(璞谷), 미로(未老), 소달(所達), 장생면(長生面) 등 9개면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현종 13년(1672)에는 삼척포첨절제사가 영장(營將)을 겸하고 영동 9개군의 병권을 관장했으며 다음 해는 삼척영장이 토포사를 겸직하여 울릉도를 포함하여 치안을 맡게 되었다.
영조 14년(1738)에는 행정개편이 이루어졌는데 9개면을 12개면으로 확대하여 말곡(末谷), 부내, 노곡, 근덕(近德), 원덕(遠德), 미로, 소달, 상장성(上長省), 하장성(下長省), 견박곡(見朴谷), 도상(道上), 도하(道下)가 되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삼척도호부를 삼척군으로 개명하고 그 다음 해에는 평릉도 찰방제도, 두 해 뒤에는 삼척포진이 폐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삼척관내 12개면 중에서 부내와 말곡을 합해 부내면(府內面)이라 했으며 도상, 도하, 견박곡을 합하여 북삼면(北三面)이라 불렀다. 부내면은 1917년 삼척면으로 고쳤는데 1938년 10월 1일에는 삼척읍(三陟邑)으로 승격되었고, 북삼면은 1945년 7월 1일 북평읍(北坪邑)으로 승격되었다. 1960년에는 상장면이 장성읍(長省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는 소달면이 도계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에는 장성읍 황지리가 황지읍(潢池邑)으로 승격 분리되어 5개읍 5개면으로 인구 30만명의 전국 최대의 군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1980년 3월 27일에는 법령 제3188호에 의거 북평읍과 묵호읍을 합해 동해시(東海市)가 되었고, 1980년 12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0050호에 의거하여 원덕면이 원덕읍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1981년 7월 1일에는 법령 제3425호에 의거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쳐 태백시(太白市)가 되었고, 1982년 10월 20일 조례 제934호에 의거 군민의 날을 제정하였으며, 1986년 1월 1일 법령 제3798호에 의거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1986년 4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1874호에 의거 원덕읍 오저출장소에 속했던 관할구역이 가곡면(柯谷面)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에 의거 원덕읍 용화리와 장호리가 근덕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 4월 1일 삼척군 조례 제1371호에 의거 도계읍 신기출장소 관할 7개리와 도계읍 마차리가 신기면(新基面)으로 포함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삼척군의 행정구역은 도계읍(道溪邑), 원덕읍(遠德邑), 2개읍과 가곡면(柯谷面), 근덕면(近德面), 노곡면(蘆谷面), 미로면(未老面), 신기면(新基面), 하장면(下長面)의 6개면으로 편제되어 2개읍 6개면의 종합도시로 발전했다.

삼척의 위치

삼척의 위치와 향토문화
삼척의 지리적 위치는 강원도 영동지역의 최남단으로 동쪽은 전체가 바다에 접하고 있는바 극동은 동경 129도 22분으로 원덕읍 월천리가 해당되며, 극서는 동경 128도 52분으로 하장면 공전리, 극남은 북위 37도 02분으로 가곡면 풍곡리, 극북은 북위 37도 25분으로 미로면 내미로리이다. 즉 동쪽은 동해안과 삼척시에 접하고 서남쪽은 태백시 연화동, 서쪽은 정선군 임계면, 남쪽은 경북 울진군 북면, 북은 동해시 삼화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동서간 46.7km 남북간 거리는 48.5km이다.
부족국가시대의 삼척의 영역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실직국 영역을 파악할 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다면 신라 파사왕 23년(102)에 실직곡국과 읍즙벌국이 서로 국경분쟁이 일어남으로 금관국 수로왕을 불러 서로 다투는 땅을 읍즙벌국에 속하게 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에는 삼척과 안강의 중간 지점인 평해나 영해까지가 남쪽 한계선이라 생각되고 북쪽은 명주군 옥계면(예전 우계현으로 시군 통합으로 강릉시)까지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16년(757)에 행정구역 개편시 죽령현, 만향현, 우계현, 해리현의 4개현만을 관할케 되어 울진 이남은 타지역이 되었다. 이로부터 오랜 세월이 변하는 동안 동해시와 태백시가 분할 승격되었고 1986년 삼척읍이 삼척시가 되었다가 1994년 시군통합으로 삼척군과 삼척시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삼척에 관한 전승 속담은 여러 개 있는데 그 중에서 많이 쓰는 것은 “강원도 안가도 삼척이다” “척하면 삼척이다”라는 것과 “삼척냉방”이라는 말이다. 전자는 무엇을 아는 척한다고 할 때 쓰는 말로 삼척의 척자를 따서 쓴 것이므로 강원도 삼척이 그만큼 잘 알려졌음을 암시한다. 또한 삼척 냉방은 본래 삼청냉돌(三廳冷突)에서 나온 말이다. 삼청은 조선조 때 임금을 보호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의 금군삼청으로 숙직할 때 겨울에는 불을 때지 않고 철저히 지킨 것에 유래한다. 그것이 발음상 삼척맹방과 유사하여 잘못 전한 것이다.
이러한 지명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고대국가 시대부터 실질국의 찬란했던 문화를 지녀왔으며, 이후 삼척도호부로서 인정을 받았던 이 지역민들의 문화적 자긍심과 수려한 자연환경에 대한 애정이 표출되어 전해온 것이다. 더욱이 다양한 민속과 독특한 언어, 산간문화와 해양문화, 농경문화의 조화를 통해 풍부한 감수성과 따뜻한 향토애를 지닌 지역민들이 창출한 향토문화는 새로운 의미의 실직문화 재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계읍

도계의 지명 유래
도계읍은 조선조 인조 8년(1630) 5월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2월에 사임한 삼척부사 이준(李埈)이 소달산의 이름을 따서 소달리면(疎達里面)이라 하였는데 당시 소달동의 소부락 명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 후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許穆)이 소달리(所達里)로 개명 하였으며 이후 『여지도서』(與地圖書,1759)에는 소달면으로 나오고 있다. 1661년 삼척부사로 왔던 허목(許穆 1595-1682)의 『陟州誌』(척주지, 현종 3년 1662년 6월 편찬)와 최만희(崔晩熙)가 쓴 『진주지』(眞珠誌, 1963)등에는 노곡면의 서남쪽으로 붉은 박달나무와 황장목인 소나무, 뽕나무, 옻나무가 성하고 곡식으로는 콩, 보리, 메밀 등과 인삼과 밀봉이 많이 생산된 하였다. 또한 견두리(堅頭里)에는 석영의 일종인 마노(瑪瑙)가 산출된다 하였다.

심의승(沈宜昇)군수가 쓴 『삼척군지』(三陟郡誌, 1916)에는 당시 산물로 쌀, 밀, 콩, 밤, 감자, 소채 등으로 밭이 약 70정보, 논이 약 480정보라 하였다. 또한 삼림은 심포리, 흥전리, 구사리에서 소나무, 박달나무, 황장목 등이 나오고 임야 일만 삼천여정보에서는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적송이 산출되며 신기시장은 1908년 설치 이후 많은 교역의 중심지로 소, 마포, 미투리, 쌀의 집산지가 되었다고 한다. 삼척군 교육장이었던 김정경(金鼎卿)의 『삼척향토지』(三陟鄕土誌, 1955)에는 산악이 험하고 사람과 짐승이 이르지 못하므로 병화(兵火)피난지라 하였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는 고사리(古士里)를 기점으로 위쪽을 상소달(上所達)이라 하고, 그 아래쪽을 하소달(下所達)이라 부르던 때도 있었으나 다시 소달면(所達面)이 되었다. 소달면에는 수로(壽老), 구미(九味), 서하(西下), 고무릉(古武陵), 대기(大基), 대이(大耳), 신기(新基), 사무(士武), 대평(大坪), 안의(安衣), 거제(巨濟), 마차(馬次), 발리(鉢里), 차구(次口), 한내(汗乃), 상고사(上古似), 하고사(下古似), 눌구(訥口), 장탄(長灘), 서동(瑞洞), 산기(山基), 무중(武仲), 점동(店洞), 소달산(所達山), 마교(馬橋), 배목(排木), 신리(新里), 황조전(黃鳥田), 역덕전(驛德田), 도계(道溪), 전두(田頭), 응암(應岩), 고기(高基), 심포(深浦), 구사(九士)등 39개리를 관장하였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신기, 서하, 고무릉, 대이, 대기, 발리(發里), 차구, 산기, 안의, 대평, 마차, 무건(武巾), 고사, 한내, 점리(店里), 눌구, 마교, 도계, 흥전(興田), 전두, 상덕(上德), 황조, 신리, 구사, 심포의 25개리로 개편하고 1962년 11월 21일 소달면(所達面)을 승격하여 도계리의 이름을 따서 습소재지를 도계읍(道溪邑)이라 개명하였다. 도계읍에는 조선조 연산군때 삼척 심씨인 심광수(沈光壽)가 강릉 회산리에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종때와 광해군, 현종때 여러 곳에서 각 성씨들이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탄광을 개발하고 상권을 형성하며 번창하다가 최근 들어 석탄산업합리화사업으로 폐광이 잇따르면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다.

원덕읍

원덕의 지명 유래와 지리적 특성
원덕읍은 삼척군의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계읍과 함께 삼척군 2읍중의 하나다. 1993년 현재 총면적 176.68km2 에 1개출장소와 11개 법정리, 28개 행정리, 144개반, 43개 자연부락이 있고 호산리에 읍사무소가 있다.

조선조 인조 8년(1630) 삼척부사 이준이 근덕면과 원덕을 합한 지역을 덕번(德蕃)이라 하였으며 『척주지』에 의하면 현종 3년(1662) 허목 부사때는 궁촌(宮村) 남쪽을 덕번하(德蕃下) 혹은 원덕번(遠德蕃)이라 하였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는 영조 때 원덕면(遠德面)또는 원덕면(願德面)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순조 1년(1801) 신덕(新德)이라 했다가 다시 원덕번(遠德蕃)이라 불렀으며, 고종 10년(1906) 원덕면을 분리시켜 치남(峙南), 치북(峙北), 혹은 천남(川南) 또는 가곡(柯谷)과 천북(峙北)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가 1910년에 두 지역을 합쳐 원덕면이라 했다.
원덕면에서는 초곡(草谷), 용화(龍化), 장호(莊湖), 임원(臨院), 노곡(魯谷), 옥원(沃原), 수리(壽里), 마천(痲川), 부호,(芙湖), 재산(才山), 월천(月川), 노경(魯耕), 축천(杻川), 삽곡(揷谷), 기곡(杞谷), 탕곡(湯谷), 오목(梧木), 오저(梧底), 풍동(豊洞), 동활(東活), 매원(梅院)등 2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20개리로 개편하고 1943년 초곡리(草谷里)와 매원리(梅院里)를 근덕면에 이속 시켰고, 1980년 12월 1일 대통령령 제 10050호에 의거하여 원덕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6년 3월27일 대통령령 제 11874호에 의거하여 원덕읍 오저출장소가 가곡면으로 승격되어 탕곡, 오목, 오저, 풍곡, 동활 등 5개리로 구성되었으며, 1987년 1월1일 대통령령 제 12007호에 의거 원덕읍 용화리와 장호리가 근덕면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원덕읍은 11개 법정리인 갈남리, 기곡리, 노경리, 사곡리, 옥원리, 월천리, 이천리, 임원리, 축천리, 호산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원덕읍은 동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남쪽방면에서 삼척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며 서쪽방면으로는 호산 황지간 포장도로가 개통되어 원덕읍은 삼척, 울진, 태백을 잇는 3방면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쪽으로 태백시와 도계읍, 남쪽은 경북 봉화군과 울진군, 북쪽은 근덕면과 노곡면에 이웃하고 있으며 동서와 남북 각 28km다. 원덕읍의 지세는 도계읍과 태백시의 경계인 우보산에서 시작된 두 개의 산맥이 흘러 내려 서남으로 뻗은 산맥은 태백시, 봉화군,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해안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석포산, 응봉산, 갈령이 생겼으며 북쪽으로 뻗은 산맥은 도계읍, 노곡면, 근덕면과 경계를 이루며 사금산, 마천산, 우액산을 이루었다. 가곡천은 석포령과 태백시, 도계읍과의 경계인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월천리 앞바다에 이르는 동안 좌우에 비옥한 평야를 형성 하였다. 마천은 우액산, 마천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이천, 옥원, 호산을 관통하며 동해로 들어가며 비옥한 들판을 역시 형성하였고 임원천 유역에 농토가 형성되어 있다.

도로는 원덕읍의 남북을 관통하는 동해고속화도로가 1979년 확포장되어 부산에 이르며 태백시로 이어지는 도로는 가곡천을 따라 풍곡리에 이르러 한쪽은 동활리, 도계읍 신리, 구사리를 거쳐 태백시 황지에 이르는 44km며 다른 하나는 풍곡리에서 서쪽 봉화군과의 경계인 석포령까지 32km다. 바다로는 임원에서 을릉도까지 정기여객선이 1980년에 개통되었으며 임원항에는 싱싱한 활어회를 찾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고 있다.

원덕읍의 농업은 하천유역의 비옥한 들판에서 벼농사와 보리농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잇는데 전체 경지면적은 1993년 942ha에 논 503ha 밭 439ha이며 채소류 생산량도 많아서 무, 배추의 경우 187.3ha 에 이르고 있다. 어업은 26.9km의 해안선을 따라 12여개의 어촌에서 2,085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어선도 동력선이 176척, 무동력선이 84척이나 된다. 비교적 유명한 어항으로는 임원, 갈남, 용화 장호 등이 있으며 수산물도 풍부할 뿐 아니라 동해안의 경치도 아름다워 국민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특히 미역, 김 오징어, 운단, 전복, 해삼, 기타 어류 등이 잡히며 임원리 돌김은 과거에는 궁중 진상품이라 하며 고포미역도 명물로 알려졌다.

임업은 국공 사유림을 합쳐 14,571ha로 마천산, 우액산 등은 국유림으로 침엽수가 가장 많으며 활엽수, 혼효림 순으로 되어 있다. 해안지방은 한서의 차가 크지 않고 겨울철은 온난하나 내륙 산간지방은 여름철이 서늘하고 한서의 차가 큰 편이다.

관공서는 1910년 면사무소를 초곡리에 설치했으며 이듬해인 1911년 10월 임원리로 옮겼고 1913년 옥원리로 다시 옮겼다가 1924년 호산리로 옮긴 후 읍사무소가 되었다. 교육기간은 조선 순조 24년(1824) 축천리 산양동에 소동사를 세우고 익성공 황희를 제향하였으며 그후 철종 8년(1857)에 산양서원이라 개칭하였다. 1861년 묘정비를 건립하였으며 고종 5년(1868)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삼척향교에 이부되었다. 그 후 일제하에 일보 헌병들에 의해 산양 서원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971년 10월 산양서원 묘정비각을 중건하고 중단된 제례를 봉행하여 옛 유림들의 교육기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21년 5월 20일에 호산리에 덕흥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38년 호산 심상소학교로 바꾸었고 1941년 호산국민학교로 다시 개명하였다. 이외에도 임원국교, 축천국교, 노실분교, 신남분교, 이천분교, 기곡분교, 사곡분교 등이 학생수가 줄고 있다. 중학교는 원덕중, 임원중학교가 있으며 고등학교는 원덕고가 있다. 명승고적으로는 갈남 월미도, 이천폭포, 소공대비, 산양정 등이 있다.

근덕면

근덕의 유래
근덕면은 삼척군 2읍 6면중의 하나로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삼척시에, 남쪽은 원덕읍에 서로 접하며 동서 18km, 남북 22.8km, 총면적 129.55km2이다. 행정구역개편으로 1943년에는 원덕면 초곡리와 매원리를, 1973년에는 노곡면 금계리를 편입하여 1993년 14개의 법정리와 38개 행정리, 138개반, 56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해리현(海利縣) 또는 파리현(波利縣)이라 불렀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삼척군은 4개현을 거느리고 있어 그 중 해리현은 본래 고구려 파리현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인데 어딘지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조선조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陟州誌)에는 “교동 서쪽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가정연간(嘉靖年間,1552-1566)에 김은필이 성밑 냇가에서 옥잔을 주었는데 그 잔에 파리(波利)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덕번(德蕃)이라 하였는데 척주지(陟州誌)에 “인조 8년(1630) 부사 이준이 지금의 원덕, 근덕 지역을 총괄하여 덕번이라 하였다.” 덕번이란 말은 덕산리(德山理)의 덕봉산(德峯山)의 형상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즉 그 모양이 물더멍과 흡사하여 ‘더멍산’ 이라는 속칭을 한자로 덕번산이라 썼다 하며, 일설에는 옛날 바다에 삼형제산이 떠내려와서 하나는 덕봉산이 되고 하나는 원덕읍 해망산이 되고 또 하나는 영해군의 죽산이 되었다 하는데 ‘떠서 들어온 산’의 뜻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 덕번산이라고 한다.
현종 때 부사 허목은 덕번을 2개 지역으로 나누어 덕번상(德番上)과 덕번하(德番下)로 하였으니 지금의 근덕면을 덕번상이고 덕번하는 현 원덕읍이 되는 셈이다.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영조때부터 근덕면이라 칭하였으니 근덕(近德)이란 가까운 덕번이란 뜻에서 취해진 것이다. 이후 근덕면은 상맹방, 하맹방, 교가, 덕산, 부남, 광태, 교곡, 동막, 궁촌 등의 9개리1를 관할하다가 1943년에는 원덕면의 매원, 초곡, 1973년에는 노곡면 금계리, 1987년에는 원덕읍 장호, 용화리를 편입시켜 14개 법정리가 되었다.
근덕면의 지세는 입봉산맥이 서남쪽 노곡면 경계에서 시작하여 삼척시의 경계인 한재를 이룬다. 궁방산은 궁촌리 서쪽 노곡면 경계에 있으며 사라치와 양야산이 그 사이에 솟아 있으며 덕봉산은 하맹방리와 덕산리 사이에 있다. 마읍천은 노곡면 육백산과 주지리에서 발원하여 교가리에서 무릉천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흘러 맹방리 소한천과 보태져서 덕산리 앞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추천은 한우봉에서 발원하여 궁촌리와 원평리를 거쳐 역시 바다로 유입된다. 도로는 한재에서 원덕읍으로 통하는 동해 고속화도로가 1989년 확포장되어 있으며 동막리 노곡면 마읍리를 거쳐 문영재를 넘어 도계읍 신리와 태백시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나있고 교곡리를 거쳐 노곡면 하월산리로 통한다.
근덕면은 노업은 마읍천, 무릉천, 소한천과 추천 등의 유역에 비옥한 농토가 많아 벼농사의 적지로 생산량이 많다. 전체 경지면적은 1,245ha로 논 620ha, 밭 625ha로 삼척군에서는 하장면 다음으로 넓은 지역을 지니고 있어 식량 작물은 미곡샌산량이 맥류에 비해 10배가 많은 편이다. 기타 잡곡류와 두류, 서류가 생산되며 채소류는 무, 배추, 고추, 마늘, 대파, 당근의 생산이 많다. 과실류는 사과생산이 배나 복숭아에 비해 월등히 많고 감과 포도도 생산된다. 가축은 한우를 667가구에서 2,058마리를 사육하고 돼지도 16가구 1,119마리를 사육하여 삼척군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기타 산양, 닭, 칠면조도 키우고 있는 농가가 많다.

근덕면의 임야는 9.554ha로 군내에서는 중간 정도를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 국유봉산으로 지정된 궁방산에서 적송과 흑송이 나오며, 야생종실은 원덕읍 다음으로 많아 밤, 오두, 잣, 도토리, 대추, 은행 등이 생산된다. 어업은 해안선이 22.8km로 어촌가구수가 385가구에 1,204명, 어선 129척이 있다. 1종어항인 덕산항과 장호항은 정치망과 자망어업항, 해수욕장으로, 2종어항인 초곡항과 궁촌항은 정치망과 공동어업항이 형성되고 해수욕장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어촌종합 개발항으로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다. 광공업은 비금속광과 금속광 일부가 있으나 실적은 미미한 편이다. 상업은 면사무소가 있는 교가리의 시장이 있어 상설시장을 겸하고 있는 매월 1일과 6일에 정기시장을 열어 근덕면 물산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공서는 면소재지인 교가리에 근덕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근덕지서, 우체국, 농협, 농촌지도소 등이 있다.
근덕면에는 많은 수의 충효열행 비각이 있는데 7개소의 효행각, 4개소의 열행각, 1개소의 효부각이 있다. 천연기념물은 궁촌리의 음나무가 363호로 지정되었으며 금계리의 초당굴이 226호, 지방유형문화재로는 하맹방리의 교수당이 61호, 영은사 대웅보전이 76호, 영은사 팔상전이 77호, 괘불이 10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한 기념물로는 교가리 느티나무가 있으며 문화재자료로는 무릉리의 김인주 씨 가옥이 있다. 이밖의 고적으로는 고려 충선왕이 맹방해안에 향나무를 파묻고 용화회주를 기다렸다는 매향맹방정유적지와 궁촌리의 공양왕릉, 동막리의 신흥사, 초곡리의 촛대바위와 용소, 근덕국교 앞산에 있는 관덕정, 삼현사, 회선대, 해운정 등이 있다.

하장면

하장의 유래
하장면은 본래부터 삼척군 지역으로 삼척군 2읍 6면중의 하나다. 허목 삼척부사가 쓴 척주지(陟州誌)에 의하면 “인조 9년(1631) 삼척부사로 왔던 이준(李埈)이 삼척부 관내를 9개리로 나누어 다스릴 때 장생리(長生里)라 하였다.” 고 했으며 1916년 심의승 군수가 쓴 『삼척군지』(三陟郡誌)에 “숙종 연간에 금대산 동맥의 남북을 구분하여 상장성(上長省), 하장성(下長省)이라 하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1963년에 작성된 최만희의 『진주지』(眞珠誌)에는 “상장면은 원래 장생리로 영조 14년(1738) 부사 유건기(兪建基)가 금대산 동륵 북쪽을 하장성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장면의 원래 이름을 장생리라 하였다가 통치상 숙종, 영조 연간에 금대산(金臺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맥을 경계로 하여 그 남쪽을 상장성, 북쪽을 하장성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장성면이라 부르며 한리, 판문, 거리, 대전, 역둔, 둔전, 어리, 용연, 공면, 탄둔, 갈전, 가전, 중봉, 장전, 고혈, 여동, 하시천, 숙암, 지오, 현내, 조곡, 천포, 상사미, 하사미, 가리, 원동, 연자귀, 말둔 등 32개리를 관할하다가 순조 원년(1801) 부사 이수빈(李壽彬)이 줄여서 하장면이라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도상면(道上面, 현 동해시)의 군대, 가목, 도전의 3개리를 병합하여 22개리로 개편하였다.

법정리는 중봉리, 번천리, 숙암리, 광동리, 장전리, 추동리, 갈전리, 토산리, 공전리, 조탄리, 하사미리, 상사미리, 원동리, 역둔리, 대전리, 둔전리, 어리, 용연리, 한소리, 판문리 등이며 역둔출장소가 있다.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와 도전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는 하장면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자로 임계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0년에는 갈전리에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 광동리로 신축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며 이곳에는 하장지서, 우체국, 농협단위조합, 농촌지도소, 보건지소, 소방지소 등의 기관들이 있다. 하장면은 삼척군 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동해시와 미로면 및 도계읍에, 서북은 정선군에, 남은 태백시에 인접하고 있고 동서 18Km, 남북 28Km, 총면적 260.04Km2이다. 하장면의 북방 고적대는 임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중봉산, 동남쪽으로는 청옥산, 두타산을 이루며 동해시와 경계를 이룬다. 또한 두타산 남쪽 산맥은 미로면과 경계에 댓재, 도계읍과의 경계에 덕항산 및 건의령을 이루면서 금대산에서 동쪽 산맥과 합하여 도계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으로 하장천은 번천과 중봉천이 원류로 한강 상류에 속하며 번천은 번천리 묵소에서 발원하고 중봉천은 중봉리 고적대밑에서 발원하여 갈전리 동남방에서 합류, 하장천이 되어 정선군으로 유입된다. 대전천은 용연, 둔전, 역둔, 어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역시 정선군으로 유입되며 광동리에는 광동댐이 건설되었다.
현재 도로는 태백시에서 정선군 임계면간의 국도 35호는 하장면의 남북을 통과하며 숙암리에서 댓재를 넘어 미로면을 거쳐 삼척시가지로 통하는 자동차 도로인 군도 365호가 있다. 또한 갈전에서 추동, 둔전, 역둔, 대전리를 지나 정선군 동면으로 통하는 지방도 424호가 있고 상사미, 원동, 어리, 둔전, 역둔을지나 지방도 424호와 연결되는 군도 364호가 나있다. 『 척주지』에 의하면 1662년 당시 “장생은 영서로 깊은 산속에 위치하며 해변에서 1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서리가 일찍 내려 백곡이 성숙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맥(이맥), 호맥(호맥), 숙(숙)이 생산된다. 또 울탄(지금의 어리)에는 회목(회목)이 생산되는데 동해에 배를 만드는 재목으로 쓴다”고 하였다.
특산물로는 중봉리의 토종꿀은 예부터 이름이 났으며 명산지는 중봉산, 청옥산 계곡과 광동굴, 원동리 월둔굴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갈전리 느릅나무, 숙암리 고분군, 두타제의 시작을 알리는 댓재산신각 등이 있다.

삼척군 향토축제인 두타문화제는 1991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년 군민화합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개최되는데 전야제때 하장면 댓재 산신각의 제례로 시작하여 용왕제, 등불놀이, 폭죽놀이 등과 문예행사, 민속행사, 체육행사, 군민한마당잔치가 열린다.
예로부터 ‘하장의 칠전팔기’라는 말이 전하는데 이것은 예전에 하장에 살던 가난한 어떤 사람이 호박을 따러 가니까 아직 여물지 않고 배는 고프고 하니 매일 호박밭에 갔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가서 호박을 따면 돌아오리라”하고 갔는데 일곱 번 엎어지고 여덟 번만에 가서도 호박을 못따고 울면서 배고프게 돌아 왔다고 한다. 그래서 하장의 칠전팔기(七顚八起)란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가난했던 시절의 좋은 교훈이다.

노곡면

노곡의 유래와 환경적 특징
노곡면은 삼척군 2읍 6개면 중의 하나로 지리적으로는 중앙에 위치한다. 총면적은 144,59Km2로 1개출장소 16개 법정리, 16개 행정리, 44개반, 48개 자연부락이 있으며 하월산리 1반에 면사무소가 있다.

노곡면은 본래 삼척부의 계곡방(溪谷坊)이었는데 조선조 18대 임금인 현종 3년(1662) 삼척부사였던 허목이 쓴 『척주지』(陟州誌)에는 노곡(蘆谷)이라 기록하고 있다. 노곡면의 지명유래는 본디 ‘계곡방’의 ‘계곡’이 발음상 ‘개골, 깨골 또는 갈골’로 변하면서 이에 적합한 한자인 갈대 노(蘆)자를 써서 ‘노실’ ‘노곡’등으로 바뀌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오을산리’(五乙山理)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노곡면의 옛지명으로 유추되는 계곡방의 계곡이 들어 있는 ‘올산계곡’(兀山溪谷)을 뜻하며 현재의 월산리는 ‘오을산’ 또는 ‘올산’이 ‘월산’으로 “어울린 산”이라는 뜻으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허목부사 당시에는 27개리를 관할하였는데 비계(蜚鷄), 우건(牛件), 고자(古自), 방지근(防之斤), 한태(寒太), 월산(月山), 군천(軍川), 답원(畓原), 장좌전(將坐田), 우검(牛劒), 수암(水岩), 산죽기(山竹基), 개산(開山), 여삼(閭三) 창전(蒼田), 상반천(上班川), 하반천(下班川), 상천기(上川基), 십구미(十龜尾), 양반기(兩班基), 둔달전(屯達田), 주지(舟旨), 말리기(末里基), 마읍(麻邑), 궁기(宮基), 죽전(竹田)이었다. 이후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여삼(閭三), 상천기, 상반천, 하반천, 금계(金鷄, 고자, 우발(宇發), 상월산(上月山), 하월산(下月山), 개산, 상군천(上軍川), 하군천(下軍川), 둔달(屯達), 주지, 상마읍(上麻邑), 중마읍, 하마읍의 17개리로 개편되었고, 1973년 금계리가 근덕면으로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16개리가 되었으며 1964년 2월 1일 삼척군 조례 72호에 의거하여 마읍출장소 1개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삼척 김씨, 삼척 진씨(陳氏) 등이 있으며 조선 명종때 김광필, 정인보, 광해군때 안공헌, 인조때 윤종인, 박태규, 김치순, 심지호 씨 등이 이주해 와서 각 마을을 이룩하였다.
노곡면은 동서 12Km 남북 28Km로서 삼척군의 중앙부에 있고 동쪽은 근덕면, 서쪽은 도계읍, 남쪽은 원덕읍, 북쪽은 삼척시와 인접하고 있다. 평균높이 해발 200m이상의 산간지역으로 되어 있는 노곡면은 육백산 지맥인 산악으로 둘러싸여 그 남북으로 거신령산, 장군항, 삿갓봉 등이 있으며 마읍천이 주지리 및 상마읍에서 발원하여 근덕면 동막리로 유입된다. 또한 둔달리 타령재에서 발원한 군천은 북쪽으로 흘러 하월산과 고자리 경계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근덕면 하맹방리 소한굴에서 나오고 있다. 고자리로부터 북쪽은 건천이 있고 들입재 서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하월산리에서 군천과 합류된다. 도로는 삼척시, 미로면, 근덕면, 도계읍 등으로 통하는데 하나는 들입재 및 우발리를 통과하여 근덕면으로 들어가고, 두 번째는 반천리와 여삼리를 지나 여심령을 넘어 삼척시내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세번째는 군천리 및 둔달리를 지나 타령재를 넘어 도계읍으로 통하는 길이고 넷째는 타령재에서 갈라져 상마읍을 지나 도계읍 신리, 구사리를 거쳐 태백시 통리에 이른다. 명승지와 유적지로는 천기천 계곡을 중심으로 적병산의 석정용소, 한두골의 돌우물, 상반천리 한누골의 용소굴 폭포, 마읍천 주변의 구장문, 하마읍의 망귀현, 촉거암, 가평의 조현대, 상마읍에 있는 신라때의 사고(史庫), 궁전터, 여행원의 옛터, 상월산리의 둥양곡에 있는 동양사터, 여삼리의 도리네 굴, 의병장 박걸남 묘, 신라의 산상대로 등이 있다. 동족마을로는 상천기리에 삼척 김씨, 고자리에 영일 정씨가 있으며 삼척민요인 메나리가 불리는 고장이다. 교육기관은 노곡국교, 여삼분교, 둔달분교, 마읍국교, 주지분교(92년 9월 1일 폐교)등 4개교가 있으며 전체 10학급 91명이 재학중이다. 관공서는 1910년 고자리에 처음 면사무소를 설치했으나 1924년 4월 하월산리에 이설했고 중마읍리에 면사무소 출장소를 두고 있으며 면사무소 소재지인 하월산리에는 노곡지서, 노곡우체국, 기타 기관들이 있다.

미로면

미로의 유래와 문화유적지
미로면은 삼척군 2읍 6면중의 하나로 지리적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총면적은 99.15km2로 14개 법정리, 17개 행정리, 61개반, 38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로면은 처음에 허목 삼척부사가 1662년에 쓴 『척주지』 에 미노리(眉老里)라 하였으며 그후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미로면(未老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조 21대 영조 14년 (1738)에는 미(尾)자가 허목의 별호라 하여 아닐 미(未)자로 고쳤다 한다. 이때는 28개리를 관할하였는데 비암(比岩), 무사(武士), 둔점(屯店), 상거로(上巨老), 하거로(下巨老), 대락지(大落地), 의암(衣岩), 상정(上鼎), 하정(下鼎), 하천기(下川基), 장사(長巳), 괴음정(槐陰亭), 상활지(上活只), 하활지(下活只), 지역사(紙役寺), 동산(東山), 상사전(上士田), 하사전(下士田), 성조암(成造岩), 죽치(竹峙), 화천(花川), 조지전(鳥趾田), 내미로리(內未老里), 구곡(九谷), 저태(著台). 흑악(黑岳)이었다.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내미로리, 사둔(士屯), 무사(武士), 상거로, 하거로, 상정, 하정, 천기, 활기, 상사전, 하사전, 동산, 고천(古川), 삼거리의 14개리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른다.

미로면은 동쪽으로 삼척시에, 서쪽은 하장면에, 남쪽은 노곡면 및 도계읍에, 북은 동해시에 서로 접하고, 동서 12Km, 남북 16Km로 원래 살던 주민은 삼척 김씨, 삼전 진씨, 삼척 박씨등이었다. 고려때 조선태조의 4대조인 목조가 전주에서 이주하였으며 고려 충렬왕때 동안거사 이승휴가 정착하였고 그후 조선조에는 각 성씨들이 이주하였다.
미로면의 지세는 북방으로 두타산이 동해시 및 하장면 경계에 솟아 있으며 솔모산맥과 죽치, 근산, 육백산 등이 미로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하천은 오십천이 미로면 중앙을 통과하고 죽치밑에서 발원하는 사전천은 상정리에서 고천은 하거로리에서 오십천과 합류된다. 도로는 1937년 동해시에서 출발하여 오십천을 따라 도계읍으로 통하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고 하거로리에 미로역과 상정리에 상정역이 있으며, 자동차도로 또한 삼척시에 통하는 도로와 하거로리에서 갈라져 삼거리를 지나 죽치를 넘어 하장면에 이르는 길, 천기리에서 갈라져 노곡면 월산리에 이르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미로면의 산업은 경치면적이 통 721ha로 논 110ha, 밭 611ha이며 시량작물은 미곡보다는 맥류가 많은 실정이고 두류와 잡곡류가 일부 생산된다. 채소류는 무와 배추를 생산 고추와 마늘, 대파, 당근도 생산량이 늘고 있다. 과실류는 감이 15.3ha로 가장 많으며 기타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등이 생산되고 있고 가축은 한우를 502호에서 1,324마리를 사육하고 개, 산양, 닭 등의 순으로 기르고 있다. 임야면적은 총 8,439ha로 야생종실은 도토리, 대추, 밤, 호두, 은행 등과 송이버섯류가 생산되고 있다. 옛부터 활기리와 동산리의 산림이 유명하였는데 그동안의 벌채로 황폐해진 관계로 국가적인 조림사업과 입산금지 등으로 다시 울창한 삼림구역으로 바뀌고 있다.

문화재는 지방기념물로 1981년 8월 5일 제 43호로 지정된 활기리에 있는 목조고비의 묘인 준경묘와 영경묘, 87년 6월 8일 제 60호로 지정된 내미로리의 천은사 이승휴 유허지, 문화재자료 제 96호로 85년 1월 17일 지정된 고천리의 김영우 씨 가옥이 있으며 비지정동굴로 상거로리의 칠밭재굴, 하정리의 하정굴, 동산리의 동산굴 등이 있다. 명승지는 미로 4경인 구방산(九房山), 적병강(赤屛江), 천은사(天恩寺), 두타산(頭陀山)이 있는데 50여년전 윤학명, 함종석 씨가 4계절의 경치를 노래를 지었다.

미로라 좋은 곳 한 번이라도 와보소/봄이면 구둘산(구방산)꽃구경이 절경이라네/얼싸 좋다 얼싸 좋아 미로마을 제일이야(후렴)/미로라 좋은 곳 두 번 다시 와보소/여름이면 적병강에 뱃놀이가 흥겹다네/미로라 좋은 곳 세 번 다시 와보소/가을이면 천은사 단풍수경 그림같네/미로라 좋은 곳 네 번 다시 와보소/겨울이면 두타산에 눈썰매가 멋있다네/ 지역에 전하는 재미있는 말로는 못난 사람을 일러 “미로면노미” 라 하면 거꾸로 읽으나 바로 읽으나 마찬가지라며 한번 버릇을 잘못 들이면 쉽게 고칠수 없다고 한다.

가곡면

가곡의 유래
가곡면은 1986년 3월 27일 대통령령 제 11874호에 의거하여 원덕읍 오저출장소에 속해있던 동활리, 오목리, 오저리, 탕곡리, 풍곡 1리, 2리를 합하여 1986년 4월 1일 면으로 승격된 곳이다.
가곡면이라 함은 풍곡리 삿갓봉에서 발원하여 빙돈(氷洞)에 이르러 북쪽 도계읍 신리에서 오는 내를 합하여 동해로 들어가는 연장 41.9Km의 가곡천에서 따왔다.

신기면

신기의 유래
신기면은 1989년 4월1일 삼척군 조례 제1371호에 의거 도계읍 신기출장소 관할 7개리인 고무릉리, 대기리, 대이리, 대평리, 안의리, 신기리, 서하리와 도계읍 마차리의 지역이 신기면으로 승격된 곳이다. 여산 송씨가 새로 개척한 터전이라 하여 ‘새터’라 불렀으며 한자로는 신기(新基)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