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SAMCHEOK CULTURAL CENTER

민속
삼척지역 문화유산의 생명과 가치를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창조적 지역문화의 산실

독경신앙

삼척의 산간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형태는 독경이다. 정초에 안택을 할 때도 경객(경쟁이, 독경쟁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청하여 빌었고 산메기를 갈 때도 대개는 경객을 데리고 갔다.
특히 병이 나도 약을 구하거나 병원이 멀어 갈 수 없었던 산간지역에서는 거의 독경으로 잡귀를 물림으로써 병을 낫게하는 방법에 의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병굿을 거의 볼 수 없고 안택이 남아있다.

원래 독경은 전국적으로 장님들이 하던 것이었다. 장님들이 호구지책으로 독경을 했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들은 나라에서 만든 맹승단체에 속해있어 국가에서는 가뭄이 들거나 질병이 돌면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시켰다. 이들은 실제 중은 아니었으나 모두 삭발하고 있어 맹승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후 불교가 탄압을 받자 선사로 겉모습을 바꾸었다. 또한 일반인 가운데서도 안택과 독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나 이들을 경쟁이라고 불렀다.

삼척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독경은 원래 기복의례와 축귀의례가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미친 사람이 있을 때 독경을 하고 산메기에 따라가는 정도이다. 독경의례의 종류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액막이 : 토정비결등을 통해 그 해 액이 나쁘다고 하면 행하는 간단한 의례로, 대개 정월 대보름에 한다. 열두달 액을 막아주고 도액경을 외운다.
삼재풀이 : 삼재가 든 사람을 위한 의례로 삼재경을 외우고 삼재부적을 문지방위에 생년월일을 적어 붙인다.
산치성 : 봄이나 또는 사월 초파일에 산에 가서 자손발복을 비는 의례로, 산신경, 산령경, 산왕경등을 외운다.
살풀이 : 부모 자식간이나 부부간에 살이 끼었을 때 풀어주기 위한 의례이다. 살풀이를 하려면 먼저 쑥대궁으로 활을 만들고 메밀(또는 수수팥떡)을 반죽하여 화살촉을 만들어 살이 낀 사람을 계속 쏘면서 살을 푸는데, 해살경을 외운다.
안택 : 집안의 안과태평과 건강, 생업의 풍요를 위하여 해마다 하는 의례로, 먼저 부정을 풀고 부엌에서 조왕, 장독대에서 토주, 안방에서 성주와 제석으로 모시고 조상굿을 하기도 한다. 안택을 할 때에는 성조대신, 당산신령, 조왕대신, 칠원성군, 호구별성, 삼불제석, 명산신령, 사해용왕, 누대영가 등의 위목을 붙이고 부정경, 명당경, 성주경, 조왕경, 지신경, 제석경, 고사덕담과 조상해원경을 외운다.
퇴송 : 병의 원인이 출입하다가 잡귀가 범접한 것으로 판명되면 밤에 마당에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퇴송을 한다. 이때는 간단히 상을 차리고 축귀경을 외운다.
상나세 : 퇴송으로 낫지 않거나 조상에 탈이 있어 병이 든 것으로 생각되면 상나세를 한다. 상나세는 상을 차려 조상을 대접하는 것이다.
독경 : 조상에게 빌어도 낫지 않으면 이번에는 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잡아없앰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례를 행하게 되는데 이를 송경, 또는 독경, 병굿이라고 부른다. 무속이 신을 청하여 위무하고 달래어 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면 독경은 주로 잡귀를 물리치는 적극성을 띠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당은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는데 치중하지만 독경은 경문을 외워 잡귀를 협박하고 결박하여 영원히 나올 수 없게 가두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다. 또한 신격도 무속이 신앙하는 신보다 도교나 불교의 위경의 신들을 주로 모셔 성격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독경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었으나 요즈음은 충청도나 전라도에서는 안택이 남아있고 강원도는 아직 병을 고치는 독경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무속신앙

삼척은 전통적으로 세습무권이다. 즉 신들림의 경험 없이 집안으로 내려온 무당들이 굿을 해왔던 것이다.
굿은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서낭굿, 또는 어업하는 사람들의 풍어를 위한 별신굿이 많이 행해졌고, 개인적으로는 바다에서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한 넋건지기굿과 혼인 전에 죽은 영혼을 결혼시키는 영혼혼사굿, 그리고 재수굿 등이 있다.
삼척의 어촌에서는 정기적으로 서낭굿, 또는 어룡제라고 부르는 마을굿을 해왔다. 삼척굿의 특징은 어업도 중시하지만 마을전체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의도가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즉 별신굿의 성격보다 마을서낭굿의 요소가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용의 과다지출과 신앙심이 줄어들면서 차차 중단되는 추세에 있다. 현재까지 굿을 하고 있는 마을들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추천에서는 격년으로(3년마다 라고 한다) 음력 3월중에 날을 받아서 무당을 청해 굿을 하는데 이를 어룡제라고 부른다. 어룡제의 비용은 추렴없이 어촌계가 부담하는데 공동어장의 이익금에서 낸다. 당골무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근덕으로 이사간 이금옥(별호 뚱뚱이 무당, 1991년 겨울에 사망)이었는데 노쇠하여 굿을 못하게 된 88년부터 신들린 무당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세습무당보다 값이 싸고 주민들의 흥을 돋구어주어 평이 좋다고 한다. 그후부터는 당골무당을 따로 정하지 않고 해마다 무당을 바꾸어 부른다. 이유는 두어 번 쓰다가 보면 당골로 굳어져 마을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90년에는 삼척의 꼬마무당이 왔었고, 92년에는 묵호에서 데려왔다고 한다. 무당은 어촌계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의사를 종합, 청하게 된다.

굿은 아침 11시경 시작하여 밤을 새고 다음날 오전에 끝난다. 제물은 특이한 것이 없고 돼지머리, 대구포 외에 일반적인 제물이 오른다. 어룡제를 지낼 때 여유있는 선주들은 만신을 청하여 배 안에 제물을 차려놓고 따로 용왕제를 지낸다.

초곡의 마을굿은 단오 때 한해 걸러서 하는데 어룡제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날을 받아서 굿을 했었다. 굿은 5월 4일 초저녁에 원당에서 시작하여 6일 아침에 마친다. 굿에는 주민들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구경을 온다. 일단 서낭굿이 끝난 후 선주들은 바닷가에 있는 해서낭(해랑)에 가서 용왕제를 한다. 당골무당이 죽은 후 무당의 선정은 4월 중에 마을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예전에는 소를 잡아 통째로 올렸었는데, 지금은 돼지를 잡는다.

임원은 3년에 한번씩 굿을 하는데 모든 가구가 돈을 추렴하여 경비를 마련한다. 굿은 9월에 하고 정씨서낭과 고씨서낭인 두 여서낭의 대를 내려 남서낭을 모신 큰 서낭당으로 모셔와 굿을 한다. 이곳에서 이틀간 굿을 한 뒤 삼일째 되는 날은 바닷가로 나와 용왕제를 지낸다. 굿을 할 때는 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올린다.

행정구역상으로 삼척시 교동에 속하는 후진에서도 굿을 한다. 굿은 예전에 2년에 한번씩 하던 것을 1993년까지는 3년에 한 번, 1993년부터는 5년에 한 번씩 굿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굿의 이름은 서낭굿이라고 하고 동짓달에 하는데, 전속 무당으로는 근덕 뚱띠이 무당(이금옥), 묵호 용칠이 무당들이 해오다가 현재는 그 후손들이 한다.

삼척시 오분동의 풍어제는 4-5월과 11월에 하며 계원의 생년월일, 지역의 텃세를 고려하여 날짜를 정하고 굿은 용골무당을 계속하여 불러 간략하게 한다. 제당은 산너머에 있으며 부정을 타지 않은 선주들은 돈을 놓고 절을 하며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다. 마을 제사는 통장이 관장하지만 풍어제는 어촌계가 중심이 된다. 이제 삼척에서 행해지는 마을굿의 내용을 주로 해안마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정굿 :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과 굿청의 부정을 가시기 위해서 하는 굿으로, 무녀는 물과 불로 부정을 가셔낸다.
당맞이굿 : 서낭신을 맞이하는 굿으로, 굿청은 대개 바닷가에 임시로 만들기 때문에 서낭당에 가서 당을 내려 신을 모셔오게 되며, 서낭당이 둘이면 두 군데, 셋이면 세군데를 돌아 마을을 수호하는 신들을 모셔온다.
하회동참굿 : 숫서낭과 암서낭, 그리고 그 외 무속에서 신앙하는 모든 신들이 함께 동참하여 굿청에 좌정하기를 기원하는 굿이다.
조상굿 : 조상신을 청하여 자손들을 돌보아주기를 빈다.
세존굿 : 시준굿, 당금애기, 또는 제석굿이라고도 하며, 세존은 인간에게 복을 주는 생산신으로 알려져 있다. 세존굿에서는 규중처녀 당금애기가 부모 형제가 모두 집을 비운 사이에 세존이라는 신적 존재와 결합하여 아들 셋을 낳은 후 함께 세존을 찾아가 아들들은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당금애기는 삼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긴 서사무가가 불려집니다. 또한 제주에게 고깔을 씌우고 염주를 걸어준 후 동냥을 하게 하는 ‘중잡이놀이’도 있다.
성주굿 : 성주는 가신이다. 가정에서 대주를 대표하는 중요한 신이어서 특별히 모신다. 성주굿에서는 집을 짓는 과정과 집안의 살림을 차리는 무가가 불리어진다.
논동우굿 : 일명 군웅굿, 장수굿이라고도 하며, 각도의 장수를 불러 모시는 굿이다. 장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무녀는 놋동이를 입에 무는 묘기를 부린다.
지신굿 : 터를 관장하는 신을 모시는 굿이다.
심청굿 : 천하의 효녀 심청이 넋을 불러주는 굿이라고 한다. 눈총이 맑게 하기 위해서 굿을 한다고도 하며 심청가의 내용을 무녀가 부른다.
천왕굿 : 일명 원님굿이라고도 하는데, 천왕은 불교적 신의 이름으로 굿의 내용은 정확하지 않다. 굿이 끝나면 원님놀이라는 굿놀이가 행해진다.
손님굿 : 손님은 마마와 홍역의 신이다. 천연두는 옛날에 가장 무서운 병이었으므로 곱게 앓도록 해달라는 기원으로 이 굿을 해왔다. 무가의 내용은 욕심 많은 철룡이 아버지가 손님을 잘못 대접하여 아들을 잃고 패가망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제면굿 : 제면은 무당의 담당구역을 의미한다. 내용은 제면할머니가 당골네들을 찾아다니면서 걸립하는 것이다. 무녀는 각도의 무당흉내를 내어 관중들을 웃기고, 굿의 마지막에는 제면떡을 골고루 나누어 준다.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굿 : 굿이 끝나감에 따라 여러 무녀가 다 함께 꽃을 들고 신을 즐겁게 하는 춤을 추고, 다시 굿청에 매어놓았던 배를 젓는 흉내를 내면 사람들은 배 안에 돈을 넣는다. 이어 등을 들고 춤을 추는데 이 모든 것은 신이 돌아가시는 길을 밝혀주고 편안히 해주는 것이다.
용왕굿 :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용왕굿은 집집마다 바닷가에 제물을 장만하여 차려놓고 뱃기를 꽂아놓은 후 행해진다. 무녀는 물동이 위에 올라가 모든 어민들에게 풍어가 있기를 축원한다.
거리굿 : 굿에 따라온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굿으로, 이 굿은 반드시 양중들인 남자가 한다. 여러 잡귀들을 흉내내어 사람들을 웃기는 유흥적인 굿이다.

가정신앙

우리조상들은 집안의 평안과 가족들의 건강, 생업의 번영을 위해 각 가정에서 갖가지 의례를 행해왔다. 삼척지역에도 많은 의례가 전승되어 왔으며, 산간마을과 해안마을의 생업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보이지만 목적과 기능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안택고사
안택은 집안이 일년동안 평안하고 가족들이 건강하기를 빌기 위해 행하는 가신신앙의 대표적 의례이다. 대개 정월이나 10월중에 날을 받아 지낸다. 날을 받을 때는 대주, 또는 부부의 생기를 맞추어 정한다. 안택하기 3-4일쯤 전에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워 잡인의 출입을 삼가게 한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안택날이 되면 먼저 당에 올라가 서낭에게 안택을 한다는 사실을 고하고 내려온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당에까지 가지 않고 문 앞에서 서낭당을 향해 절하고 술을 올리는 망제로 대신하는 경우도 흔하다.

안택의 순서는 마을마다, 집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먼저 마루에서 성주를 모신다. 성주의 신체는 대들보에 한지와 실을 매단 것으로 그 아래에 상을 차린 후 제를 올린다. 가족들은 모두 절한 뒤 식구수대로 소지를 올린다. 성주를 모신 후에는 안방으로 가서 조상에게 비는데, 이때에는 큰 양푼에 메를 담고 숟가락을 조상의 수대로 꽂아 놓는다. 이어 다시 상을 보아 부엌에서 조왕에게 빈다. 부엌에서 군웅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마지막에 바다로 나가 용왕을 모시기도 한다.


산메기
산메기는 문자 그대로 산에게 무엇인가를 먹이는 신앙이다. 즉 산을 대접하는 의례인 것이다. 그렇지만 발음이 불분명하여 산매기라고도 들린다. 그 경우에는 동해안지역의 골매기 신이 고을을 막아주는 것으로 이해하듯 산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은 영동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삼척지역에서 전승이 활발합니다. 해안지역에서도 아직 산메기를 하지만 지금은 역시 산간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산메기 터는 마을마다, 집안마다 정해진 산이 있다. 하지만 주로 태백산 줄기의 산으로 올라간다. 산메기 터가 마을뒷산인 경우도 있지만 쉰음산이나 두타산, 태백산까지 굳이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산메기는 삼월삼짓날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등 주로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경우도 있다. 산메기를 ‘조상 화전놀이 시키는 놀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이나 경을 읽는 복자(卜者) 등 전문가를 데리고 가서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들의 발복(發福)을 빈다. 산메기를 갈 때에는 한 집안의 여러 가족이나 한 마을에 사는 서너 집이 모여서 단체로 가는 것이 보편적이다. 지역에 따라 여자만 가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가기도 하지만 딸은 데려가지 않는다. 대신 집안을 이어갈 며느리를 데리고 간다.

산메기를 갈 때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산에 가서 직접 메를 짓는 수가 많다. 이때 메는 산신메와 조상메로 두 그릇이다. 산메기 터는 대개 마을단위로 지정된 장소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나무이다. 집안마다 정해진 나무가 있어 그 나무 앞에 상을 차린다. 그리고는 나무 밑동에 한지나 베조각, 실 등으로 폐백을 건다. 무당이나 복자는 그 앞에서 징을 치면서 산신, 제석, 삼신 등을 축원한 뒤 베조각을 들고 춤추면서 칼로 찢어 길게 갈라나간다. 이는 조상의 길을 갈라주는 의미가 있다고 믿고 나무에 걸어놓는다. 그리고는 소를 위하여 축원하고 소지를 올린다.

이러한 산메기는 소와 연관이 깊다고 한다. 산메기를 다니는 집에서는 평소 집안에 ‘산’이라는 신체를 모신다. ‘산’은 베조각이나 한지, 또는 왼새끼를 꼰 것으로 예로부터 부엌에 있는 소 여물통 위의 기둥에 모셨다. 삼척지방의 부엌은 원래 외양간과 붙어, 부엌에서 쇠죽을 끓여 여물통에 부으면 반대편에 있는 외양간에서 소들이 먹을 수 있게 된 구조였다. 그런데 소는 ‘산’에 매인다고 하여 소가 아프거나 새끼를 낳을 때면 으레 산 앞에 가서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 상례였다는 것이다. 산메기를 다녀온 후 ‘산’은 새 것으로 갈게 된다.

산메기의 기원이나 목적은 상당히 복합적이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먼저 기원을 보면 ‘산’이란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호환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예국(?國)에서는 호랑이를 제사지낸다고 되어있어 남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비린 것을 먹을 때마다 산에 거는 행위 역시 호랑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소가 산에 메여있다는 말도 호랑이가 물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서 나왔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산메기는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의 발복을 기원하려는 신앙이 지배적이다. 소 역시 민간신앙에서 조상으로 모시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산신과 삼신, 그리고 조상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라 하겠다.


산제당
삼척에서는 가정신앙의 하나로 산제당을 모시는 집이 적지 않다. 산제당에 갈 때는 그 집안의 가장인 남자 혼자서 길을 나서고 여자는 따라 갈 수 없는데 이는 부정을 피하기 위해서다. 가장 좋은 날을 택하여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산에 오르게 되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짐승이 지나간다거나 뱀이 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일이 생기면 다른 길을 택하여 산제당을 찾아가야 한다.

산제당에 도착하면 메를 지어 산신님께 올린다. 이 메를 생우메, 새우메라고도 하는데 밥이 다 되기 전에 솥뚜껑을 열어본다거나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산신이 드시기 전에 잡귀가 솥 안에 들어가 먼저 먹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솥과 수저도 집에서 쓰던 것이 아닌 산신님을 위한 것들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가 사용한다. 메가 다 되면 생우메 위에 산신님의 수저를 꽂고 촛불을 켜서 불을 밝힌다. 제를 올리는 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소지를 올리면서 집안의 무사평안과 행복을 빈다. 산제당은 행여 중단하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다니던 사람들은 대개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산제당을 찾는다고 한다.

산당과 산메기는 집안의 자손발복이 목적이라는 점과 산을 신앙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성격이 다르다. 즉 산메기는 마을이나 집안을 단위로 해서 부모 대부터 선대 조상을 위해서 빌어오는 것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지만 산당에 가는 것은 개인자격이다. 그래서 산메기 장소는 보통 집집마다 비슷하지만 산당은 개인마다 가는 곳이 따로 정해져 있다. 또한 산메기 할 때는 우마를 잘 봐달라는 뜻으로 소지를 올리는데, 산당에 가서는 우마를 위해 비는 경우는 없고 치성만 드린다.


뱃고사
뱃고사는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처음 배를 진수시킬 때나 고기가 안 잡힐 때, 또는 집에서 안택을 한 후에 지내는 의례이다. 배에는 의례히 배를 지켜주는 신인 성주를 모시고 있는데 여성주인 경우에는 종이에 색실을 걸고 남성주는 종이만 걸어 모신다. 뱃고사를 지낼 때는 대개 무당을 불러 간단히 비는 경우가 많다. 이때 선주들 가족과 선원들이 모두 모여 절하고 배성주를 위한다. 근덕면 덕산에서 뱃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먼저 당에서 빌고 난 후 봉할머니한데 가서 제사를 지내고 배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봉할머니는 바다에서 떠들어왔다는 덕봉산에 있다.

마을신앙

마을신앙은 마을에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의례이다. 삼척지역에는 서낭제가 어느 마을에서나 전승되고 있고, 그 외 천제(天祭)를 모시는 마을도 적지 않다. 또한 해안마을에는 성기신앙이 남아있고, 짐대서낭도 삼척지역의 중요한 신앙체라고 하겠다. 비가 오지 않을 때 행하는 기우제 역시 집단적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무당이 주재하는 마을굿이 있다.
서낭제
서낭제는 서낭제사, 서낭고사, 동네치성 등으로 불린다. 자연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어 행정적으로 구분되는 한 리에 여러 개의 당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미로면 동산리에는 세 개의 서낭당이 있어 반별로 고사를 모시고 있는데, 서낭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고, 해안마을에서는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당과 해사를 주로 돌보아주는 해서낭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낭제는 마을마다 정해진 달이나 날짜가 있다. 달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따로 날을 받아 모시게 된다. 서낭제의 시기는 정월 초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고 단오나 삼월 시월 중에 하는 경우, 또는 칠월 칠석에 지내기도 한다. 일년에 단 한번 지내는 마을도 있지만 두 번 내지 세 번 지내는 마을도 상당수가 있다.

초곡리의 경우를 보면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날에 서낭제를 지내고, 그 외 동짓달 초사흗날이 성황당 입주 상량한 날이어서 성황님 생일로 정하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 서낭제를 모시기 전에 마을에서는 먼저 제관을 선정한다. 서낭제는 남자가 중심이 되어 대표를 뽑아 한밤중에 조용히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제관은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마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제관은 제물을 장만하는 도가(유사. 당주. 소임이라고 하는 마을도 있다)와 초헌, 아헌, 종헌의 삼제관, 그리고 축관으로 대여섯명이 선출된다. 도가가 초헌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고 이외에 바깥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더 뽑기도 한다. 이중 특히 도가는 생기를 맞추어 선출하지만 마을의 토박이로서 모범적인 동민 가운데 선정되기 마련이다.

제관들은 제일이 결정되면 일주일에서 적어도 이삼 일 전부터 금기에 들어간다. 마을에서는 서낭당과 제관의 집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워 잡인을 금한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서낭당 근처에 함부로 갈 수 없고 제관들의 집에 가는 것도 삼가한다. 특히 제관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상가(喪家)에 가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만약 마을에 초상이나 해산이 있으면 날을 물리게 된다. 마을을 위하여 일하면서 이처럼 금기가 엄격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주민들이 도가를 맡기를 꺼려 이장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장이 부정을 탔을 때에는 도리 없이 다른 사람이 맡게 된다.

제물은 마을에 따라 다르다. 대개 포와 어물, 육고기, 삼실과와 백설기 등을 쓰고 서낭당에서 메를 지어 올리며 조라술을 담그기도 한다. 하지만 서낭신의 성격이 비린 것을 싫어하는 素서낭(대개 중서낭이라고도 한다)인 경우에는 육고기를 쓰지 않는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값을 깍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제물구입과 기타 제사에 드는 경비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거나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충당한다. 즉 동답(서낭답)을 빌려주어 받는 곡식이나 재산의 이식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도가바위라고 하여 미역이 나는 바위가 서낭제를 위한 마을 공동재산인 예도 있다(초곡리). 또한 마을공동재산은 정월에 주민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여 모은 돈과 쌀로 만들기도 한다.

제를 지내는 시간은 대개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이다. 자정에서 두시 사이에 많이 지내는데 마을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한해동안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 등 부정한 일이 없었던 남자들만 올라가 경건하게 지낸다. 이때 여자들은 올라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축이 있으면 축을 고하고 없으면, 비손으로 올린다. 서낭님께 잔을 올린 후에는 마을 가가호호의 소지를 올려주며, 각 가정의 소지가 끝나면 소를 위한 소지도 올려준다.

삼척지역의 서낭당은 나무와 당집, 돌무더기나 바위로 된 형태가 가장 많다. 당집 안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城隍之神 神位라고 쓴 단순한 위패도 있고, 城隍之神, 土地之神, 勵疫之神을 함께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흙이나 쇠로 만든 말을 모시는 마을도 많다. 말은 한 마리인 경우도 있고 여러 마리를 함께 모시기도 한다. 대개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있는데 서낭을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가 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은 서낭님이 타고 다닌다고 믿는다. 서낭당 옆에는 대개 수부당이 있어 수부신을 위해준다. 수부는 서낭님을 모시던 주민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이 되었다고도 하고 서낭신의 부하라고도 한다.

해안마을의 서낭제는 특별히 해사를 돌보는 신을 따로 모시는 마을이 많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과 해사를 돌보는 신으로 갈라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때 해사를 돌보는 서낭은 대부분 여신이지만 남신일 때도 있다. 용화리에는 본서낭당이 1리에 있고 바닷가의 해신당은 2리에 있다. 본당에서의 제사는 1리와 2리의 주민 모두가 지내고, 해신당은 어민들만 제사를 올린다. 또한 노곡에는 서낭당 외에 댕두, 또는 댕우서낭이 있어 해사를 보호해 준다. 댕우서낭은 바닷가 백사장에 약 2m 정도 높이의 작은 바위가 신체로 향나무가 자라 있는 한쪽 면의 아래에 가로 세로 30cm 정도의 단을 시멘트로 발라 만들어 놓았다. 댕우서낭에는 바닷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와서 빈다고 한다.

이제 서낭제의 구체적인 예로써 갈남마을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갈남에는 두 개의 서낭당이 있는데, 첫째는 호서낭이라고 믿는 마을의 당이고 또 하나는 해서낭이다. 서낭당은 국도를 질러 마을을 굽어보는 야산 중턱에 있다. 서낭당은 기와지붕에 정면은 넉넉한 한 칸으로 3미터쯤 되고, 측면은 두 칸인데 역시 3미터 정도이다.

안에는 城隍之神이라고 쓴 위패와 촛대하나만이 있다. 신격은 할아버지라고 하며 또한 온 몸이 하얀 호랑이라고도 생각한다. 옛날에는 서낭님 치성을 모시기 3-4일 전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함부로 호랑이란 말을 안하고 큰 짐승이라고 하며 조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위치의 서낭당은 약 40년 전에 옮긴 것이다. 그전에는 마을 어귀 개울가에 있는 나무를 서낭으로 모셨는데 주위의 나무가 부러져 서낭님이 놀라 달아나셨다고 보고 지금의 서낭당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인가가 들어와 옮겼다는 말도 있다.) 서낭나무는 그 후 약 십여 년 동안 죽어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살아났으며, 주민들은 절 받은 나무라고 하여 감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해서낭은 여서낭, 해당할머니라고도 한다. 1반 마을 집 사이에 있는데 신체는 오래된 소나무와 아래에 있는 바위이다. 그러나 나무는 몇 년 전 벼락을 맞아 부러져 왜소해졌다. 나무에는 창호지로 예단을 바쳤고 열기머리를 걸어두었다. 아래에 시멘트를 발라 제단을 마련하고 지름 50cm 정도의 남근석을 모셨다.(이 돌은 위패와 같은 의미로 신앙된다.) 여기에 잔을 붓는다고 한다. 당 주위는 길이 5m, 폭 3m 정도의 돌담을 쌓았는데, 옛날에는 이곳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나 지금은 길을 지나 바다까지 10m 정도 거리가 있다.

갈남의 서낭고사는 일년에 두 번 올리는데 치성 드린다고 한다. 시기는 정월 첫 子일과 10월 첫 午일이다. 먼저 서낭당에 올라가 자정에 제물을 진설하고 축을 읽고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주고, 이어 해당에 가서 어업하는 집의 소지를 올려준다. 치성 드리기 약 한 달 전에 삼제관을 선정하는데 이는 그동안 근신하라는 의미이다. 제물을 장만한 사람이 초헌관을 맡으며, 제물은 과거 송아지를 잡았다. 이때에는 오직 삼제관만 이 제물을 만졌다고 한다. 지금은 돼지머리, 쇠고기, 어물, 과일, 삼실과를 쓴다.

갈남의 특이한 풍속으로 도가계를 들 수 있다. 도가계는 서낭당 고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모임이다. 계수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 중 건강한 분으로 선정하고, 치성 드리기 한 달 전 제관을 선정하며, 치성이 끝난 다음 날 하기(下記)보면서(결산하는 것을 말함) 주민 전체가 음복한다. 도가계는 마을 사람 누구나 참여하게 되어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서낭고사 외에 마을의 문제를 의논한다. 도가계는 마을이 공동으로 소를 키워 만든 돈과 어촌계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자금의 이식으로 고사를 모시고 있다.

서낭제를 지내고 난 후에 거리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다리 위에서 행해지는 거리제는 ‘객귀제사’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객귀의 침입을 막고 우환을 방지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현재 내미로리에서 행해지고 있다. 또한 천기리에서는 서낭제가 끝나면 용왕제와 거랑제(거리제)를 지낸다. 남자들만 참가하여 엄숙하게 지내는 서낭제와 달리 용왕제와 거랑제에는 부녀자들도 참가할 수가 있다. 용왕제는 물에 빠지지 말고 조심하라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고 거랑제는 길에 나가 객사하여 돌아다니는 객귀들을 잘 풀어먹이기 위해서 모신다고 한다.


천제당 제사
삼척에는 천제(天祭)를 올리는 마을이 있다. 신기면의 고무능리,미로면의 내미로리가 대표적이다. 이중 내미로리의 천제봉 제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0년에 한번씩 모시는 천제봉 제사에는 반드시 왼소 한 마리를 잡아 생고기를 제물로 써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재정문제상 소를 잡지 못하다가 35년만인 1993년 7월에 지냈던 제사 때는 소 한 마리를 잡았다. 소를 잡을 때는 살아있는 소를 천제당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직접 잡는다. 또한 제주를 빚어 특별히 사용한다.

천제는 밤 12시를 기해 지내는데 이때는 남자주민들만 참석한다. 생기를 맞추어 선정한 삼헌관을 중심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제주를 올린 후 축문을 읽고 경건하게 한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음복을 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돌려 복을 함께 나눈다.

초곡리에도 상천지신을 모시는 천제당이 산꼭대기에 있다. 지금은 성황당에서 망제로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천제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월천리는 마을 입구의 숫서낭과 마을 끝에 있는 암서낭 그리고 마을 뒤편 봉화산의 천제당을 모신다. 천제당 신앙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천제당은 대개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든 형태로 집을 짓지 않는다. 하늘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기에 막지 않는다고 한다. 내미로리에서는 소를 위해 천제를 지낸다고 한다.


성기신앙(남근봉헌제)
행정구역상 원덕읍 갈남2리인 신남은 남근을 모시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지금도 신남의 서낭당에는 나무로 깍은 남근이 수십 개 잘 엮어진 채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근은 서낭제를 올릴 때 깎는다. 신남의 서낭제는 정월 대보름날과 시월의 첫 오(午)일에 지낸다. 제사를 午일에 모시는 이유는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가장 기가 센 말날로 잡은 것이라고 한다. 서낭당은 본당인 해신당이 바닷가에 있고, 큰 당은 산 속에 있는데 큰 당은 최근 산불에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해신당은 처녀가 해물을 따기 위해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애바위에 데려다 주었는데 거기서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자 죽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을 만들어 제를 지내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처녀가 죽은 뒤 고기가 안 잡혔는데 한 어부가 술에 취해 해신당 자리에 오줌을 누었더니 그후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거나 해신당 치성을 드릴 때는 신(남근)을 깎아 해신당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당주와 제관은 서낭제 올리기 2주 전에 정한다. 제관은 큰 당으로 3명이 가고 해신당으로 2명이 가서 동시에 제사를 주관한다. 당주는 제사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여 큰 당으로 가게 된다. 금줄은 서낭제 지내기 3일전에 당주집과 두 서낭당에 친다. 제관은 제사 지내는 날 향나무를 베어다가 저녁에 해신당에 걸어놓을 신을 깎는다. 신은 세 개나 다섯 개, 일곱 개 등의 홀수로 깎는데, 보통은 다섯 개이다.

제물은 일반제사와 같은 음식을 쓴다. 육고기는 소고기를 올리고 돼지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는다. 메는 큰 당과 해신당에 각각 하나씩 올린다. 또한 시루떡을 양쪽 당에 하나씩 놓는다. 옛날에 정월 보름 제사 때는 소를 잡아 미역국을 끓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였다고 한다. 제사비용은 어민들이 전복이나 해삼 등의 해물을 채취하여 적립한 동네 자금으로 충당한다.


짐대서낭
원덕읍 임원과 미로면 고천리, 활기리에서는 짐대서낭을 모시고 있다. 짐대는 흔히 다른 지역에서 솟대라고 부르는 것으로 긴 나무 위에 새 모양을 깎아 세운 것이다. 짐대는 대개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막아준다고 믿는다. 먼저 임원리의 짐대를 보면 3m 정도 높이의 소나무 기둥에 나무로 새를 (이곳에서는 갈매기라고 부름) 세 마리를 깎아 올려놓은 모습이고 새들은 모두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임원2리에 있는 짐대는 나무 위에 올려놓은 오리가 떨어져나가 기둥만 남아있다. 짐대의 몸통에는 20cm 너비의 검은 띠와 붉은 띠가 마치 용이나 뱀이 올라가는 나선형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짐대는 바다로부터 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짐대 옆에는 성황당 건물이 있다. 남성황이라고 한다. 1리에는 두 명의 처첩인 여서낭이 있어 굿을 할 때에는 대를 내려다가 모신다. 풍어제 하루 전날 무당이 칼을 들고 짐대에 가서 짐대 몸체에 종이를 걸어놓고 칼을 짐대에 던져 꽂히면 ‘성황님 오셨다’고 한다.

대방골이라 부르는 미로면 고천리 5반에도 짐대가 있다. 짐대 위의 오리는 1983년 이전까지 나무로 깎아 만들어 올렸으나 지금은 슬라브로 바꾸어 달아 놓았다. 역시 마을로 들어오는 액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기우제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목적으로 올려진 기우제는 여러 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다. 고천리는 대방골에 있는 ‘용소’에서 기우제를 한다. 하지가 지나 여름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용소’에서 개를 잡고 그 피를 바위에 칠하면 이를 씻어 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용소’는 상당히 깊다고 널리 알려진 소(沼)이다. 과거 이 곳에서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져 용소라는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용화에서 동력배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바다에 용궁이라는 곳이 있다. 가뭄이 들면 그곳에 도포와 갓을 쓰고 정장을 한 사람들이 개를 가마니에 넣어 제를 지내고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제사가 잘 올려졌을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바로 비를 만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임원에는 용왕굴이라고 하여 바다로 뻗어나간 능선에 굴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이곳에 배를 타고 들어가 산 개를 바치는 기우제를 지냈다.

삼척조비농악

예전부터 입춘날 선농단에서 행한 농악으로 특이한 가락과 복색, 진법이 특색
매년 입춘일에 오곡과 소를 잡아 선농제를 지내면서 제사를 마친 후에는 농악을 앞세워 오곡을 파종하는 놀이를 하면서 마을길을 순회하는 농악놀이인데 1984년과 1985년 삼척군에서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시키면서 다소 활성화되기도 했지만 조비마을의 인구감소와 기능보유자들의 사망 등으로 한동안 재현되지 못하였으나 삼척문화원 홍성태 강사의 집념어린 노력으로 2022년 제29회 강원민속예술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오금잠놀이

오금잠은 신릉 동국여지승람 44권 삼척도호부 풍속으로, 1575년 삼척부사 김효원의 『성암유고』, 『척주지』 그리고 『척주선생안』등 사료에 기록된 삼척고 유의 민간신앙이다.
1천여 년 동안 5월 단오를 전후, 무격에 의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던 제례행사와 주민의 놀이로서 흥겨웠던 한마당 잔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삼척시에서는 1993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 때 오금잠민속을 재정리하여 민속놀이부문으로 출연, 종합우수상을 받았다.

축성놀이

강원도내에는 지금도 여러 곳에 많은 성이 남아있다. 춘천지방의 봉의산성 삼악산성, 화천지방의 용화산, 인제지방의 한계산성, 철원지방에는 토성이 있다. 원주에 영원산성, 홍천에는 대미산성, 영월에는 노산성, 정선에는 애산성, 강릉에는 대공산성 그리고 삼척지방에는 두타산성 삼척읍성, 양양에는 양주성 권금성 등이 지금도 남아있다.
삼국시대에는 격전장이었고,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거란족 몽고족 홍건적 왜구의 침입이 잇따랐으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지방마다 거의 산성을 쌓았다. 유사시에는 이들 산성이 피난처가 되었고, 또 항전을 치루었던 현장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강원도 내에는 성돌기나 성쌓기 민속놀이가 전수되지 않았다. 그것은 성쌓기가 고된 노동이고, 매년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보수했으므로 성쌓기는 민속놀이로 전수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성쌓기와 성지기의 전설이 여러 곳에 남아있을 뿐이다. 삼척시의 [축성놀이]는 성은 많으면서도 성에 관한 민속놀이가 전혀 없던 강원도 내에서 처음으로 재현시킨 성(城)에 관련된 민속놀이다.

삼척지방에는 삼척읍성 옥원성 두타산성 포진성 등이 있었다. 삼척읍성은 3면이 석축이고 둘레가 2,054척, 높이가 4척이며 서쪽은 절벽이고 둘레가 431척으로 고려 정종2년에 쌓았다. 우왕 12년인 1386년에는 만호겸 지군사로 왔던 남은장군이 둘레 1,444척, 높이7척의 토성을 쌓았다. 서쪽은 절벽으로 408척, 조선 성종20년 1489년 부사 조달생이 증축했고, 1510년 관동의 장정을 동원하여 석성을 쌓았다.

관동장정을 동원하여 삼척읍성을 쌓을 때는 삼척부사 이윤중이 주동이 되었다. 축조하는데 어려움도 많았으나 돌을 다루는 기술과 협동심을 발휘하여 공사를 완공하였다. 삼척 [축성놀이]는 석성을 쌓을 때 작업의 능률을 올리고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게 흥을 돋구는 놀이였다. 1987년 6월 홍천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제5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삼척시의 민속놀이로 첫 출연했다. 민속놀이 인원은 총49명으로 남자46명 여자3명으로 구성했다.

관군의 지시를 받아 일꾼들이 돌을 목도로 운반한다. 운반한 돌은 두 개의 걸쳐진 나무로 위로 운반되고, 일꾼들은 지렛대를 이용하여 울퉁불퉁한 면이 없게 가지런히 쌓아올린다. 그리고 작업과정에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군다.

성이 다 쌓아지고 성문을 달게 되면 성쌓기는 끝난다. 성쌓기가 끝나면 장만해 놓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마당 놀이잔치를 벌인다.

[축성놀이] 앞뒤에 군사놀이를 곁들이면 더욱 돋보일 것이다. 향토수호의 정신과 상무정신 그리고 건강한 노동과 놀이가 어우러질 수 있다. 성이 많은 강원도내에 성과 관련된 민속놀이가 재현되면 도시건설의 현대적인 의의도 클 것이다.

토염놀이

고려왕조의 멸망과 공양왕의 비극이 점철된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남쪽으로 이어져 잇는 마을이 매원리이다. 궁촌리는 공양왕의 궁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궁마을, 또는 궁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원드르는 왕의 원집이 있었던 곳으로 원평이라고도 부르며 조선시대 재궁원이 있어 여행자의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궁촌과 매원리를 잇는 해안선에는 넓고 깨끗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피서관광객을 부르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이 백사장에 염전을 개발해서 소금을 생산했다.

조선 초기부터 말엽, 대체로 서기 1910년까지 소금을 생산했다. 자급자족하고 남은 소금은 외지에 팔았으며,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생산하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원평마을에는 염전이 5개소가 있어 염전사업이 대대로 번창해 왔다.

궁촌리와 매원리 해안에서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작업과정을 놀이마당으로 재현한 [삼척토염놀이]가 처음으로 재현된 것은 1986년 6월 삼척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제4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 때였다. 심우학씨의 고증으로 남자45명 여자13명 총 58명으로 구성하여 공연되었다.

“매원골 봄바람 불며는 / 원평 뒷산에 진달래 피네 / 가자 가자 이 소야 밭갈이 가자 / 사래긴 염전밭 언제나 다가리” 백사장에 염전을 일구고 진흙을 파와서 덮어 펴고 다집니다. 황토를 염전 바닥에 골고루 편 다음 소를 이용해서 밭갈이를 한다.

그 위에 바닷물을 계속해서 퍼붓는다. 그리고 여러 번 가래질하면 수분이 증발하여 황토에 염소가 축적되고 간수가 끼게 된다. 이 간수를 받아 가마에 넣고 불을 때서 질 좋은 소금을 만든다.

염전을 일구고 간수를 채취하고 소금을 굽는 과정에 일꾼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된다. 이 때 메놀이 노랫가락을 부르게 된다. “매원골 봄바람 불어오며는”으로 시작되는 메놀이 노래가락이 이어진다.

“구세 구세 소금을 구세 / 이 소금 구워서 무엇을 하나 / 우리나라 금상님 충성하고 / 당상에 학발 모양하세 / 고비 고사리 육계장도 소금이 들어야 맛이 나네 / 한 번 구우면 토염이 되고 / 두 번 구우면 재염이 되네 / 우리집 낭군님 소금장사 갔는데 / 원수의 비바람아 불지 말아라 / 해지고 저문 날에 어디서 자나 / 초가집 처마에 자고나 가지 / 백봉령 굽이굽이 멀기도 하네 / 성마령 고개를 언제나 넘나 / 우리집 서방님 어디로 가나 / 가래 원평 소금받으러 갔지 / 참나무 옥지게 걸머지고 / 피사리 노방때 손질을 하네 / 옥박달 짚신에 간발치고 / 가래 원평에 소금받으러 가네”

염전을 일구는 과정에서 고된 노동이 계속된다. 메놀이 노래가락에 맞추어 작업은 율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작업이 일시 중단되고, 쉬는 시간에는 주모들에게 막걸리를 받아 마시며 공복을 채우고 피로를 푼다.

염전 주변에서는 한편으로 황지 정선 영월 평창 등 산간지방에서 잡곡을 지고 와 소금과 바꾸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소금과 바꾸어 소금가마니를 짊어지고 돌아가는 산골사람들의 구성진 노래가 어우러진다.

메놀이 노래가락에 받아넘기는 후렴의 “이히히- 호호” 하는 소리는 소금굽는 노동요로서 노동의 신바람을 일으킨다. 삼척지방에는 메놀이(메나리)라 불리우는 풍년기원의 민요가 전해지는데 강릉지방에서는 오돌똑이라 부르는 것이다.

메놀이 가락에 맞춘 염전놀이 가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소금을 굽는 민속놀이는 그 옛날 생업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살대세우기

살대세우기는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와 동막리, 덕산리 등지에서 전승되었던 정월대보름 민속놀이로 해방 이후 미군이 진주할 때 마지막 살대를 세운 이래 전승이 끊어졌다가 1990년 재현되어 현재는 3년 주기로 실시되며 특별한 행사시 년 2회씩 살대를 세우기도 한다.
살대세우기는 정월대보름 입간민속으로 마을의 액살을 방지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1월 13일에 살대를 세워서, 음력 2월 15일 영둥할머니가 하늘로 올라가는 날 살대를 내리는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제액초복의 민간심성이 잘 표현된 독창적이고 신앙적인 민속놀이다.

살대를 세우는 방법은 해마다 마을의 중심부에 4-5미터 정도의 나무를 세우는데 밑부분은 소나무로, 윗부분은 대나무로 결합한다. 이 나무에 스무 갈래의 굵은 새끼줄로 사방에서 고정시킨다. 살대에서 솔이라는 것을 매다는데 이 솔은 볏집단을 묶어 밑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마치 술잔을 뒤집은 모양이다. 한편 살대 상단에는 등불을 매달아 어둠을 밝히고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쓴 깃발을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각자 꼬아서 동여 맨 스무 갈래의 새끼줄에는 오색종이와 중간 중간에 괭이, 호미와 체바퀴 짚으로 만든 솔을 달며 주부들은 치 및 밥주걱을 매달기도 한다. 이 모든 장식물들은 농사의 풍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또 특이한 것은 소나무 살대의 상부에는 나무로 오리를 깎아서 각 두 개씩 북쪽을 향하여 고정시키고, 화살과 활을 매어 동쪽을 향하게 하는데, 오리나 화살도 살을 막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살대를 다 만들고 나면 농장과 대방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살대세우기는 네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우선 주민들이 힘을 합쳐 살대를 세우고 여기에서 살대제를 지내며, 다음엔 농악대의 지신밟기, 그리고 주민들의 뒷풀이와 음복례가 행해진다.

마을에서는 살대제를 지내기에 앞서 농장을 뽑는데, 농장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농군의 대표인 셈이다. 그는 대방이라는 보좌관을 대동하고 살대제를 거행하는데 예전에는 농장이 농군들에게 영을 내려 짚신, 멍석, 삼태기를 만들어 오게 하고 살대를 세우는 날에 그것을 상품으로 주었다고 한다.

살대를 세우고 나면 제물을 차려놓고 도포에 유건을 쓴 농장이 마을사람들을 대표하여 절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고축을 하면서 절을 올린 후 술을 살대에 붓고 나서 주민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살대 주위를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이 때 주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잡색으로 꾸며서 농악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살대 주위를 돈다. 이 과정이 놀이로서의 즐거움을 고조시키므로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흥겹게 춤추고 논다. 구경하던 할머니들은 어깨춤을 추고, 수줍은 새댁들은 몰래 훔쳐보면서 음식을 장만한다. 제가 살대세우기를 볼 때마다 감동적인 것은 주민들 스스로가 즐거워하는 것 때문이다.

삼척기줄다리기

삼척시 전역에 전승되고 있는 삼척기줄다리기는 1976년 6월 강원도 무형문화제 제2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강원도문화재위원이었던 김일기선생님의 고증과 기줄다리기 기능보유자 장봉식선생님의 지도로 1986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삼척시와 삼척문화원, 삼척기줄다리기보존회의 노력으로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 6개 지역 민속줄다리기와 함께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4개 나라 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삼척기줄다리기의 기원은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농자는 치국의 근본이요 식자민지본이라 하여 농민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서였다 하는데,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오십천을 중심으로 서북쪽지역을 말곡(末谷), 남동쪽 지역을 부내(府內)로 나누어 어린이들의 속닥기줄로 시작하여 어른들의 큰기줄다리기로 절정을 이룬다.

전하여지는 이야기로 기줄다리기에서 이긴 쪽은 풍년 풍어가 되고 그해 1년 동안은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진 쪽은 1년간 부역을 전담하지만 이긴 쪽과 한마당 놀이를 통해 만사형통한다 한다. 삼척기줄다리기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15일 동안 어린이들은 속닥기줄로, 청소년들은 중기줄로, 최종적으로 어른들의 큰기줄로 절정에 이르는데 이처럼 장기간동안 확대지향적인 대규모의 행사는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총지휘관인 파장(대표)이 말을 타고 유지들로 구성된 참모급 인사들은 의관정제하고 자기편 전사들을 맞아들인다.

이 때 각 전사들은 자기 동리의 파장을 기줄머리인 마두에 올려 세우고, 맨 앞에는 부락기 영기 등을 세우고 풍물패가 형형색색의 의상과 가장을 하여 길군악을 울리며, 나머지 장정과 노소 부녀자들은 줄을 메고 뒤를 따르니 그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한다.

각 동리에서 가져온 짚을 술비통에 넣어 줄을 만들고 그 줄들로 큰기줄을 만드는데 보통 한나절을 다 보내고, 줄을 만든 다음엔 밤 열 한 시경까지 시가행진으로 흥을 돋구며 기싸움을 했으며, 실제 기줄다리기는 12시가 되어야 시작했다고 한다.

자정이 넘어 거대한 쌍방의 줄을 맞대고 비녀장목을 지른 뒤에 경기는 새벽 1시경에 시작된다. 시합이 시작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화단결하여 파장이 휘두르는 깃발에 따라 움직였으며 대체로 3시간 또는 4시간 정도 소요되고, 새벽 동이 틀 무렵이면 겨우 시합이 끝나는데 승부가 잘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합에서 이긴 쪽에 풍년이 온다고 믿었다.

또한 삼척기줄다리기가 사대광장에서 처형된 죄수들의 귀신과 도깨비들을 쫓는 행사라는 전설도 있다.

삼척기줄다리기의 서막은 입춘일 선농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로부터 시작된다. 선농제를 마친 후 부락을 한바퀴 돌면서 새해 봄이 온 것을 알리게 된다. 이 신호가 기줄다리기의 준비신호인 셈이다.

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 당시의 놀이는 3과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과장은 시합준비이다. 부내 말곡 두팀으로 나누어 부내는 청룡기 말곡은 백호기를 앞세우고, 대등 연등 기타 각색의 등불과 광솔불 솜방망이불을 밝히고, 풍물패를 앞세워 입장 시합준비를 한다. 제2과장은 기줄다리기 시합이다. 밝은 달빛과 광솔불 밑에서 징을 신호로 하여 경기는 시작되는데, 자기 편을 위하여 모든 사람이 참여한다.

기줄 선두에는 파장이 올라서서 총지휘하는데 각 팀은 이 파장의 신호에 따라 일치 단결한다. 줄다리기선수로 참가하지 못한 부녀자 노인 아이들은 선수들에게 막걸리 안주 등을 먹여주며 목청 높혀 응원한다.

마지막 과장은 화합의 잔치이다. 승부가 판가름 나고 이긴 팀이 환호하다가 곧이어 양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놀이마당을 벌인다.

술비놀이

삼척의 대표적인 민속놀이가 강원도무형문화재 제2호인 기줄다리기이며, 기줄다리기란 바다의 게 모양같은 줄로 당기기시합을 하는 놀이인데 바다의 “게”는 삼척지방에서 “기”라고 하므로 게줄이 기줄로 불리고, 이 기줄을 만드는 과정의 놀이가 바로 술비놀이다.
술비놀이가 재현된 것은 1973년 3월 5일 제1회 삼척고유민속 기줄대회 때였다. 그리고 강원도민들에게 선을 보인 것은 1983년 6월 제1회 강원도민속경연대회에 출연했을 때였다.

“에헤야 술비야 술술 술비야, 달이 뜨네 달이 뜨네 정월보름 다가왔네” 라는 술비노래를 부르면서 기줄다리기에 사용할 줄을 튼다. 판대기에 구멍 3개를 뚫어놓고 짚이나 칡줄기를 그 구멍으로 통해 꿸 수 있게 한다.

3가닥을 한데 모아 5㎝ 굵기의 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든 줄을 다시 3가닥으로 모아 틀어서 한 줄로 만든다.

각 동리마다 의무적으로 줄을 틀어 모아 온다. 굵기가 한 뼘 이상, 길이는 50발 이상이다. 기줄을 틀 때 판대기의 구멍이 세 개가 뚫려 있는 틀을 [술비통]이라 부른다. 세 개의 구멍을 통해서 짚과 칡줄기 등으로 꼬이는 줄이 “비비닥”소리를 내면서 술술 잘 빠져나와 기줄이 만들어진다 하여 [술비]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술비통에서 술술 줄이 꼬여 나올 때 작업장에서 흥이 더욱 고조된다. 그러면서 [술비노래]는 계속된다. 술비노래의 가사에 등장되는 부내면과 말곡면, 사대광장, 봉황산, 갈야산은 삼척지방을 표상해주던 상징적인 마을, 광장, 산의 이름이다.

재현된 삼척 [성북술비놀이]는 네마당으로 구성되고, 출연진은 남자37명, 여자4명 총41명이었다,
첫째마당에서는 흥겹게 농악놀이를 하면서 태극형을 만들어 보인다. 태극기형 농악놀이로 흥을 돋군다.
둘째마당은 [술비놀이]에 참여하는 단원이 융호와 단결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보인다.
셋째마당은 상호협조한다는 뜻에서 두줄로 마주 서서 놀이를 한다.
넷째마당에서 술비통 줄틀기놀이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짚과 칡줄기를 대주는 사람. 구멍에 넣는 사람. 틀어진 줄을 잡아당기는 사람, 모두 일체가 되어 술비통 줄틀기를 한다.

기줄다리기의 전력을 다지면서 마을사람들의 정신력을 하나로 모으고, 튼튼히 결집시킨다.